[브리야사바랭의 미식 인문학]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누군지 맞혀보겠다
오늘날 우리는 맛집을 찾아다니고, 정성스럽게 차려진 음식 사진을 SNS에 공유하며, 그 맛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이러한 '미식 문화'가 하나의 철학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200년 전, 프랑스 혁명의 불길을 피해 도망쳤던 한 망명자의 파란만장한 삶이 있었습니다. 현대 미식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 앙텔름 브리야사바랭(Jean Anthelme Brillat-Savarin)의 통찰을 통해,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식탁의 진짜 의미를 인문학적으로 탐구해 봅니다.
1. 뉴욕의 바이올린 켜는 망명자
1794년 뉴욕의 한 레스토랑. 프랑스 억양의 영어를 구사하는 마흔 즈음의 남자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습니다. 거구의 체격에 총명한 눈빛을 지닌 이 남자는 연주가 끝나면 주방으로 들어가 요리사를 돕고, 손님들과 밤늦도록 음식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브리야사바랭. 불과 얼마 전까지 프랑스의 존경받는 법조인이자 의원이었던 그는, 공포정치의 단두대를 피해 스위스와 네덜란드를 거쳐 이곳 미국까지 흘러 들어왔습니다.
망명객의 삶은 고단했지만, 역설적으로 그에게 '시간'이라는 귀한 선물을 주었습니다. 판사라는 직함도, 정치적 의무도 내려놓은 채 그는 평생 품어온 근원적인 질문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각이란 무엇인가?", "왜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인간은 가장 완벽한 행복을 느끼는가?"
2.먹는 즐거움은 '죄'가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다
브리야사바랭이 살던 18세기 유럽에서 음식에 탐닉하는 것은 결코 우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적 전통 아래 '탐식(Gluttony)'은 영혼을 타락시키는 7대 죄악 중 하나였고, 철학자와 귀족들은 정신적 가치만을 고귀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브리야사바랭은 이러한 엄숙주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파격적인 인식의 전환을 선언했습니다.
"우주는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살아있는 존재들이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먹는 행위에서 쾌락을 느끼고, 그 경험을 언어로 기록하며 타인과 나누는 과정이야말로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고귀한 조건임을 강조했습니다. 미각은 결코 열등한 감각이 아니라, 인간의 기억과 감정, 문화를 잇는 핵심적인 통로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습니다.
3.맛은 혀가 아니라 '시간'과 '뇌'로 느끼는 것이다
브리야사바랭은 그의 저서 《미각의 생리학》에서 미각의 메커니즘을 현대 과학에 필적할 만큼 세밀하게 분석했습니다. 그는 미각을 두 단계로 구분했습니다. 음식이 혀에 닿는 찰나의 직접적인 감각과 음식을 씹고 삼킨 후 그 향이 코 뒷길로 올라오며 전체적인 인상을 형성하는 완전한 감각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뒷맛이나 여운을 즐기는 행위의 과학적 근거를 이미 200년 전에 정립한 셈입니다.
그는 생존을 위한 에너지 신호인 식욕과 즐거움을 위한 쾌락의 신호인 미각을 엄격히 구분했습니다. 놀랍게도 이는 현대 뇌과학의 발견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에너지를 감지하는 시상하부의 작동이 배고픔을 해결한다면, 맛의 기쁨은 뇌의 도파민 보상 회로를 자극하여 우리에게 행복감을 선사합니다. 그는 인간이 단지 살기 위해 먹는 존재가 아니라, 감각의 즐거움을 위해 먹는 '미식적 존재'임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4. 미국 망명 생활이 가르쳐준 '식탁의 민주주의'
브리야사바랭의 사상에서 미국 망명 시절은 매우 중요한 분기점입니다. 그는 코네티컷의 야생에서 칠면조를 사냥해 그 풍미를 기록하고, 보스턴에서 신선한 굴을 즐기며 식재료에 대한 안목을 넓혔습니다. 하지만 그가 미국에서 목격한 가장 혁명적인 장면은 바로 식탁의 민주주의였습니다.
엄격한 계급 사회였던 프랑스에서는 누가 어디에 앉고 어떤 순서로 음식을 먹는지가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반면 미국인들은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섞여 음식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주고받았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미식가(Gourmand)**라는 개념을 귀족의 전유물에서 대중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미식은 이제 권력의 과시가 아니라, 기쁨을 찾는 모든 이들의 권리가 되었습니다.
5. 새로운 요리가 새로운 별보다 소중한 이유
그가 남긴 문장들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이들의 가치관을 대변합니다. 특히 다음의 두 문장은 그의 실용주의적 철학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새로운 요리의 발견은 새로운 별의 발견보다 인류의 행복에 더 많이 기여한다."
첫 번째 문장은 단순히 영양학적인 조언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식탁 위에서 내리는 선택에는 그의 가치관, 취향, 정체성이 투영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는 우주 너머의 별을 하나 더 아는 추상적인 지식보다, 오늘 내 입안에 전해지는 요리 한 접시가 주는 실질적인 행복이 인류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고 믿었습니다.
6. 미식가'라는 새로운 정체성의 탄생
브리야사바랭 이전의 화려한 식사가 주로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그는 미식을 '감각을 계발하고 경험을 축적하는 앎의 과정'으로 재정의했습니다. 미식가는 단순히 많이 먹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에 집중하고 그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음식 사진을 찍어 SNS에 공유하고 리뷰를 남기는 행위는 단순한 자기과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브리야사바랭이 말한 '경험 축적형 미식'의 현대적 변용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먹는 행위에 대해 이토록 진지해져도 된다는, 아니 진지해져야만 한다는 **'철학적 허락'**을 해준 셈입니다. 우리가 남기는 한 장의 음식 사진은 곧 우리의 감각을 계발하는 인문학적 기록인 것입니다.
200년 전 판사가 던진 마지막 질문
브리야사바랭은 평생 판사라는 본업에 충실했지만, 죽기 두 달 전 일흔의 나이에 비로소 자신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인 《미각의 생리학》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혁명과 망명의 거친 풍랑 속에서도 그를 지탱해준 것은 식탁 위의 대화와 그 속에서 피어나는 행복의 기록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만든 미식의 언어는 여전히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식사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행위를 넘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고도의 문화적 행위가 되었습니다.
오늘 당신이 선택한 그 한 끼는, 당신이라는 사람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고 있나요? 그리고 그 식탁은 당신을 얼마나 진실하게 행복하게 만들었나요? 200년 전의 판사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COMMENTS
의견을 남기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