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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바다가 더 풍요로운 이유오야시오 한류와 유빙이 만든 홋카이도의 식탁

애들빙자여행러 · 2026년 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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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칼바람 속에서 만나는 버터 향의 유혹

2월의 홋카이도 오비히로, 기온은 영하 20도 아래로 곤두박질칩니다. 숨을 들이쉬면 콧속이 순식간에 얼어붙고 살을 에듯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듭니다. 하지만 무릎 높이까지 쌓인 눈길을 헤치고 '육화정(롯카테이)' 본점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공기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바뀝니다. 코끝을 스치는 진한 버터와 달콤한 바닐라 향은 이 땅의 혹독한 추위를 잠시 잊게 만듭니다.

우리는 흔히 추운 땅의 음식을 떠올릴 때 '생존'을 위한 저장식을 생각합니다. 절이고, 말리고, 훈제하여 기나긴 겨울을 버텨내기 위한 고육지책 말입니다. 하지만 홋카이도의 식탁은 생존을 넘어선 '풍요'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 척박한 추위가 풍요의 근원이 되었을까요? 그 비밀의 실마리는 이곳의 명물 '마르세이 버터샌드' 포장지 한가운데 새겨진 의문의 문양, 동그라미(◯) 안에 새겨진 **'성(成)'**이라는 글자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02추위가 바다를 뒤섞을 때 생명이 깨어난다

직관적으로는 따뜻한 바다가 더 생명력이 넘칠 것 같지만, 사실 차가운 바다는 따뜻한 바다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생태계를 품고 있습니다.

  • 수직 혼합 원리: 겨울이 되어 표층의 바닷물이 차갑게 식으면 밀도가 높아져 아래로 가라앉습니다. 이때 심해에 머물던 질소와 인 같은 영양염류가 위로 끌어 올려집니다. 추위가 거대한 국자처럼 바다를 뒤섞어 영양분을 수면으로 배달하는 셈입니다.
  • 어버이 조수, 오야시오: 홋카이도 동쪽을 흐르는 한류 '오야시오(親潮)'는 그 이름처럼 만물을 키우는 어버이 같은 존재입니다. 남쪽의 쿠로시오가 맑고 깊은 쪽빛을 띤다면, 오야시오는 플랑크톤이 워낙 밀집해 있어 녹색이나 갈색을 띱니다.
  • 유빙의 선물: 오호츠크해에서 내려오는 유빙은 바닷물보다 수백 배 높은 농도의 철분을 머금고 있습니다. 봄이 되어 얼음이 녹으며 풀려난 철분은 플랑크톤의 폭발적인 증식을 유도하고, 이는 곧 연어, 게, 성게, 가리비 등 풍성한 해산물의 기반이 됩니다.
03식물의 생존 본능이 만든 천연 부동액

땅에서도 추위는 맛을 빚어내는 핵심 요소입니다. 식물은 영하의 기온에서 세포가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 몸을 지키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 저온 당화 메커니즘: 식물은 저장된 전분을 당으로 분해하여 세포액의 농도를 높입니다. 설탕물이 맹물보다 잘 얼지 않는 원리를 이용해 스스로 천연 부동액을 만드는 것입니다. 눈 밑에서 겨울을 난 양배추나 당근이 유난히 단맛을 내는 과학적 이유입니다.
  • 토카치 평야의 기후: 오비히로가 위치한 십승(토카치) 평야는 연간 일조시간이 2,000시간을 넘고 강수량이 적으며 일교차가 매우 큽니다. 이러한 환경은 사탕무, 감자, 팥의 품질을 극상으로 끌어올립니다.
  • 가축의 적응: 젖소의 대표 품종인 홀스타인은 더위에 약해 기온이 높으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여름이 서늘한 홋카이도의 기후는 젖소에게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며, 이는 양질의 우유와 유제품 생산으로 이어집니다.

"추위는 식물에게 위협이지만, 식물은 그 위협을 단맛으로 치환해 스스로를 지켜냅니다. 우리가 느끼는 풍미는 사실 생명의 치열한 생존 신호인 셈입니다."

04같은 강, 엇갈린 두 운명의 기록

홋카이도의 풍요 뒤에는 '개척'이라는 이름 아래 가려진 선주민족 **'아이누'**의 역사가 냉엄하게 교차합니다. 1876년은 홋카이도 식문화의 기틀이 마련된 해였습니다. 마코마나이 목우장이 세워져 우유와 버터 생산이 시험되었고, 삿포로맥주 양조소가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화려한 근대화의 이면에서 아이누의 삶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 생존권의 박탈: 1883년, 요다 벤조가 이끄는 개척단 '반세이샤' 13가구가 오비히로(옛 지명 오베리베리)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아이누의 통나무배를 타고 강을 건너며 식량을 얻어 첫 겨울을 났습니다.
  • 엇갈린 운명: 하지만 바로 그 시기, 아이누에게는 주식이었던 사슴 사냥과 강에서의 연어잡이가 전면 금지되었습니다. 개척민들이 근대 기술을 이식하는 동안, 아이누들은 굶주림에 나무껍질을 먹어야 했습니다.
  • 동화의 비극: 1899년 제정된 '홋카이도 구토인보호법'은 수렵 민족인 아이누를 강제로 농경민화 시켰으나, 지급된 땅은 농사에 부적합한 비탈이 많았습니다. 이 법은 1997년에야 폐지되었고, 아이누가 선주민족으로 명기된 것은 2019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풍요는 누군가의 도움과 누군가의 희생 위에 쌓인다는 사실을 이 땅의 역사는 객관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05냄비 하나에 끓고 있는 세 가지 시간

오늘날 홋카이도를 대표하는 음식들은 여러 시대와 문화의 '적층(Layering)'으로 탄생했습니다.

  • 이시카리나베: 아이누의 전통 식재료인 연어, 일본 본토에서 건너온 된장, 그리고 개척지의 밭에서 수확한 감자와 양배추가 결합한 형태입니다. 냄비 하나에 홋카이도의 과거와 현재가 함께 끓고 있는 셈입니다.
  • 징기스칸: 1918년, 군복용 양모 자급자족을 위한 '면양 백만 마리 계획'의 부산물로 탄생했습니다. 양털을 얻고 남은 고기를 구워 먹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벚꽃 아래서 즐기는 지역 대표 식문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처럼 음식은 철저한 설계의 결과가 아니라, 시대적 요구와 우연한 만남이 층층이 쌓여 남겨진 유산입니다.

06'대기만성'의 마음으로 빚은 버터샌드 한 입

도입부에서 언급한 **'성(成)'**자의 비밀을 풀 시간입니다. 동그라미 안에 '성'이 적힌 이 문양은 사실 **'마르세이(Marusei)'**라고 읽습니다. 이는 1880년대 요다 벤조의 반세이샤가 생산했던 일본 최초의 버터 통조림 상표를 그대로 복각한 것입니다.

'반세이(晩成)'라는 이름에는 '대기만성(大器晩成)', 즉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염원이 담겨 있었습니다. 실제로 요다 벤조의 버터 사업은 당시에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94년이 흐른 1977년, '육화정'으로 상호를 변경하며 출시한 마르세이 버터샌드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실패했던 과거의 기록이 시간이라는 숙성을 거쳐 가장 달콤한 풍요로 부활한 것입니다.

홋카이도의 풍요는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영하 20도의 혹한을 조건 삼고, 그 위에 근대의 기술과 아이누의 상실, 그리고 개척민의 인내가 켜켜이 포개진 결과입니다.

우리의 삶에 닥쳐오는 차가운 '추위'는 훗날 어떤 '풍요'의 밑거름이 될 수 있을까요? 지금의 결핍이 단지 위대한 성취를 위한 아주 긴 숙성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이 달콤한 버터샌드 한 입에서 찾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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