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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미군은 왜 오키나와를 공격했나하와이 이민 돼지 550마리가 건너온 이유

애들빙자여행러 · 2026년 9월 23일

《맛의 문명사》 오키나와 편에서는 1945년을 몇 문장으로만 지나갔습니다. 돼지가 14만 마리에서 그 십분의 일 아래로 줄었다는 문장 하나 뒤에, 15분 방송에 담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글은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기록입니다. 오키나와의 식탁이 왜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왜 이 섬의 음식에 통조림과 이민자의 돼지가 섞여 있는지는 이 시기를 지나야 이해됩니다.


00전쟁의 서막

1944년 8월 21일 저녁, 나하항에서 배 한 척이 나갑니다.

쓰시마마루. 화물선입니다. 갑판에도 선창에도 아이들이 앉아 있습니다. 사이판이 함락되고 전선이 가까워지자, 정부는 남서제도의 노인과 여성과 학동을 규슈와 타이완으로 내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배편이었습니다. 학동과 일반 소개자 1,661명, 선박포병 41명, 선원 86명. 모두 1,788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여행이었습니다. 섬 밖으로 나가본 적 없는 아이들이 처음으로 바다를 건너는 길이었고, 어머니들은 부두에서 손을 흔들었습니다.

다음 날 밤 10시 12분, 배는 가고시마 도카라 열도 아쿠세키섬 부근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미군 잠수함 보핀의 어뢰가 선체에 명중합니다. 배는 그대로 가라앉습니다.

이름이 확인된 희생자만 1,484명. 그중 학동이 784명이었습니다. 소개는 아이들을 전장에서 빼내기 위한 조치였고, 그 조치가 아이들을 바다에 묻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함구령이 내려집니다. 배가 침몰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게 한 겁니다. 그래서 오키나와의 많은 부모들은 아이가 규슈 어딘가에 잘 도착해 있으리라 믿으며 그해 가을을 보냈습니다. 동시에 소문은 퍼졌습니다. 배를 타면 죽는다는 말이 돌면서, 이후 섬에 남는 쪽을 택한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그로부터 50일 뒤, 1944년 10월 10일 아침이었습니다.

6시가 조금 지나 첫 번째 공습이 시작됩니다. 오로쿠, 요미탄, 가데나, 이에지마의 비행장이 목표였습니다. 9시 20분에 두 번째 파도가 해군 비행장과 고사포 진지, 항만을 칩니다. 11시 45분 세 번째는 나하와 도구치, 나고, 운텐, 아와세의 항만과 선박이었습니다.

오후 0시 40분에 네 번째, 2시 45분에 다섯 번째. 이 두 차례는 나하에 집중됐습니다. 연 1천여 기의 함재기가 하루 동안 도시 위를 돌았습니다.

해가 질 무렵 나하 시가지의 90%가 불타 있었습니다. 류큐왕국 시절부터 이어진 항구 도시가 하루 만에 사라진 겁니다. 군민 합쳐 사망 668명, 부상 768명. 집을 잃은 사람들은 북부의 산간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미군이 본섬에 상륙하기 여섯 달 전이었습니다. 전투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01이미 무너지고 있던 생활

지상전이 시작되기 전에 이 섬의 일상은 이미 전시 체제로 넘어가 있었습니다.

1944년 7월 소개 결정. 정부는 남서제도에서 노약자와 여성, 학동 10만 명을 규슈와 타이완으로 소개하기로 결정합니다. 실제로 약 7만 명이 섬을 떠났습니다. 그 흐름을 끊은 것이 앞서 본 쓰시마마루였습니다.

1944년 10월과 1945년 1월, 방위소집. 17세부터 45세까지 남성이 소집됩니다. 주로 비행장 건설에 투입됐습니다.

1945년 3월 6일, 국민근로동원령. 15세부터 45세까지 남녀가 '뿌리째' 동원됩니다. 중등학교 남학생은 철혈근황대로, 여학생은 간호 요원으로 부대에 배속됩니다.

이 단계에서 이미 섬에는 '민간인 구역'이라 부를 만한 곳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군과 주민이 물리적으로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가 시작됩니다.


02미군은 왜 오키나와를 공격했나

1945년 봄, 미군이 오키나와를 공격한 이유는 오키나와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지도 위의 거리에 있었습니다.

태평양전쟁 후반의 미군 전략은 섬을 하나씩 건너뛰며 일본 본토로 접근하는 것이었습니다. 목표는 비행장과 정박지였습니다. 1944년 사이판과 티니안을 확보하면서 B-29 폭격기로 본토를 폭격할 수 있게 됐지만, 거리가 2,400km를 넘어 호위 전투기가 동행할 수 없었고 손상된 기체가 내릴 곳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1945년 2월 이오지마를 점령해 중간 기착지를 확보합니다.

그다음 단계가 오키나와였습니다. 규슈까지 직선거리 약 550km. 전투기가 왕복할 수 있고, 대함대가 정박할 만이 있고, 일본군이 이미 건설해둔 비행장이 여러 개 있었습니다. 미군은 1945년 11월 규슈 상륙을 시작으로 본토를 침공할 계획이었고, 오키나와는 그 작전의 발진 기지이자 보급 거점으로 지목됩니다. 작전명은 아이스버그, 투입 병력은 약 45만 명이었습니다. 한 섬을 치는 데 이 정도 규모를 쓴 것은, 그 섬이 목적지가 아니라 다음 단계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본군에게도 오키나와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본토 결전을 준비할 시간을 버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섬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사이판이나 이오지마와 달리, 오키나와는 일본이 점령한 남의 땅이 아니라 일본의 한 현이었습니다. 1879년 류큐 처분으로 오키나와현이 된 지 60여 년, 당시 약 45만 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양쪽 모두에게 중간 목표였던 땅에 수십만 명이 살고 있었다는 것. 1945년 오키나와에서 일어난 일의 대부분은 이 한 문장에서 나옵니다.


0383일

3월 23일 미군이 오키나와 제도 공습을 시작합니다.

3월 26일 게라마 제도에 상륙합니다. 지상전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이 섬들에서 이른바 '집단자결'이 일어납니다. 미군에게 잡히면 참혹하게 죽는다고 교육받은 주민들이, 일본군의 강제와 유도 속에서 가족 단위로 목숨을 끊은 사건입니다.

4월 1일 미군이 오키나와 본섬 중서부 해안에 상륙합니다. 상륙에 앞서 전함 10척, 순양함 9척, 구축함 23척 등 177문의 함포가 일제히 포문을 열었습니다. 함포와 폭격이 쉬지 않고 쏟아진 이 공격을 오키나와에서는 '철의 폭풍'이라 부릅니다.

4월 이후 일본군 제32군은 결전을 피하고 지구전을 폅니다. 슈리를 중심으로 한 고지대에 주력을 배치하고, 동굴과 진지에 들어가 버팁니다. 미군을 오래 붙잡아둘수록 본토 방어 준비 시간이 늘어난다는 계산이었습니다. 오키나와에서는 이것을 두고 섬이 '버리는 돌'이었다고 말합니다.

5월 27일 제32군이 슈리에서 남부 마부니로 후퇴합니다. 그런데 남부는 주민들이 피란해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군대가 주민들이 있는 곳으로 후퇴한 겁니다. 이후 전투는 좁은 남부에서 벌어집니다. 사망자 분포를 보면 5월은 슈리 주변, 6월은 남단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6월 18일 히메유리 학도대에 해산 명령이 내려집니다. 이미 섬 대부분이 미군의 통제 아래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오키나와사범학교 여자부와 현립 제1고등여학교에서 동원된 240명 중 136명이 사망했는데, 그중 117명이 이 해산 명령 이후에 죽었습니다.

6월 23일 제32군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가 자결하고, 일본군의 조직적 전투가 끝납니다. 오키나와는 이날을 '위령의 날'로 정하고 있습니다.

9월 7일 항복문서 조인. 6월 23일 이후에도 국지전과 희생은 계속됐습니다.


04가마 안에서 일어난 일

이 전투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장소는 가마라고 불리는 자연 동굴입니다.

오키나와는 석회암 지대라 섬 곳곳에 동굴이 있습니다. 철의 폭풍을 피해 주민들은 가족과 친척 단위로 가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같은 지형을 일본군도 이용했습니다. 어떤 가마는 군 전용 진지가 되었고, 어떤 가마는 야전병원이 되었고, 전황이 나빠지자 패잔병이 주민이 있는 가마로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한 굴 안에 주민과 병사가 섞이는 상황이 만들어진 겁니다.

미군은 가마에 투항을 권고했습니다. 응하지 않으면 이른바 '말타기 공격'을 했습니다. 입구나 굴 위쪽에 구멍을 뚫고 수류탄을 던지거나, 화염방사기를 쏘거나, 가솔린을 부어 불을 지르는 방식입니다. 안에 누가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각지의 가마에서 주민과 병사가 함께 죽었습니다.

권고에 응하지 못한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주민들은 미군에게 잡히면 참혹한 일을 당한다고 교육받았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이 굴 밖으로 나가려는 주민을 막거나, 스파이로 의심해 살해한 사례가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는 아기 때문에 굴 전체가 발각된다며 주민을 내쫓은 사례도 있습니다.

요미탄의 치비치리가마에서는 주민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바로 옆 시무쿠가마에서는, 하와이 이민을 다녀와 영어를 할 줄 알던 두 노인이 주민들을 설득해 1천 명 가까이가 살아 나왔습니다.

같은 날, 같은 마을, 몇백 미터 떨어진 두 동굴에서 결과가 갈렸습니다.


05지상전이 없었던 섬에서도

본섬에서 멀리 떨어진 야에야마 제도에는 미군이 상륙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주민 3,647명이 사망했습니다. 원인은 말라리아였습니다.

1945년 6월, 일본군은 야에야마 주민들에게 산간부로의 강제 피란을 명령합니다. 문제는 그곳이 말라리아 유병지였다는 점입니다. 류큐왕국 시절부터 그 지역에 강제 이주를 시키면 마을이 전멸한다고 전해지던 땅이었습니다. 하테루마섬 주민들은 말라리아가 없던 섬에서 유병지인 이리오모테섬으로 옮겨졌습니다.

주민의 약 절반이 감염됐고, 당시 인구의 11%가 사망했습니다. 하테루마섬은 주민 세 명 중 한 명을 잃었습니다. 이것을 '전쟁 말라리아'라 부릅니다.

미군이 오지 않은 섬에서 3,600명이 죽은 이 사건은, 오키나와 전투가 단순히 미군과 일본군의 싸움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06숫자

류큐정부가 1950년대에 추계한 오키나와 전투 사망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구분 인원
오키나와현 출신 군인·군속 28,228
타 도도부현 출신 병사 65,908
일반 현민 약 94,000
일본 측 소계 188,136
미군 12,520
전체 200,656

일반 주민 약 9만 4천 명은 1944년 인구와 1946년 인구를 대조해 산출한 추계치입니다. 당시 현 인구를 기준으로 하면 네 명 중 한 명이 사망한 셈입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는 군인보다 주민 사망자가 많았습니다.

이 숫자가 추계일 수밖에 없는 이유 자체가 이 전투의 성격을 말해줍니다. 호적을 보관하던 관청이 불탔고, 가족 전체가 사망해 신고할 사람이 남지 않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토만시 마부니의 평화기념공원에는 '평화의 초석'이라는 각명비가 있습니다. 국적과 군민을 가리지 않고 이 전투에서 죽은 사람의 이름을 새기는 방식입니다. 24만 명이 넘는 이름이 새겨져 있고, 지금도 확인되는 대로 추가되고 있습니다.


07전투가 끝난 뒤

6월 23일 이후 주민들에게 시작된 것은 평화가 아니라 수용소 생활이었습니다.

미군은 확보한 주민을 각지의 민간인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1945년 8월 무렵 본섬과 주변 섬 인구 33만 4,429명 가운데 약 85%가 수용소에 있었습니다. 수용소 안에는 고아원이 열 곳에서 열세 곳 설치됐고, 그곳에서 아이들의 쇠약사가 이어졌습니다. 1945년 6월부터 7월 사이에는 현 출신 포로 3,600여 명이 배로 하와이까지 이송되어 최장 1년 반 동안 수용되기도 했습니다.

수용소에 있는 동안 마을은 비어 있었습니다. 돌아왔을 때 원래 살던 땅이 군용지로 접수되어 있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지금 오키나와 기지 문제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이 시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밭과 가축이 사라졌습니다. 전쟁 전인 1938년 약 14만 마리였던 돼지는 1946년 그 십분의 일 아래로 줄어 있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이 섬의 의례와 외교와 식탁을 지탱한 동물이 사실상 사라진 겁니다.


08그리고 다시 식탁으로

1947년, 하와이의 오키나와 이민자들이 구제회를 만듭니다. 모금이 시작되고, 이듬해 대표 일곱 명이 미국 본토로 건너가 돼지를 사들입니다. 1948년 8월 말 오리건주에서 출항한 배는 기뢰가 떠다니는 바다를 지나고 태풍에 한 번 되돌아가면서, 약 5천 킬로미터를 28일간 항해한 끝에 9월 말 오키나와에 닿습니다. 배에서 내린 돼지는 550마리였고, 4년 뒤 섬의 돼지는 10만 마리가 됩니다.

네 해 전 같은 바다에서 아이들을 태운 배가 가라앉았고, 이번에는 같은 바다를 건너 돼지가 도착했습니다.

같은 시기, 미국의 통조림 고기가 섬의 부엌으로 들어옵니다. 냉장 시설이 부족한 섬에서 상온에 둘 수 있는 런천미트는 곧 여주, 두부와 함께 볶여 찬푸루가 됐습니다. 1950년 무렵부터는 미군을 상대하는 스테이크하우스가 생기고, 기지 식당에서 조리를 배운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가게를 열었습니다. 1984년에는 기지 앞 상점가에서 타코의 재료가 밥 위에 올라가 타코라이스가 됩니다.

오키나와 음식에 미국의 흔적이 짙은 이유를 "미군 기지가 있어서"라고만 설명하면 절반이 빠집니다. 이 섬의 식탁은 1945년에 한 번 끊겼고, 끊긴 자리를 이민자가 보낸 돼지와 통조림과 기지 앞 가게가 함께 채웠습니다. 라후테와 스팸 찬푸루가 한 상에 오르는 것은 취향의 결과가 아니라 그 시간의 흔적입니다.

라후테를 먹을 때 우리는 류큐왕국의 책봉사 접대를 먹는 것이고, 스팸 찬푸루를 먹을 때는 1945년 이후를 먹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이 글에 적힌 일들이 있었습니다.


참고

  • 총무성 「오키나와현의 전재 상황」, 「이시가키시·다케토미초의 전재 상황」
  • 내각부 오키나와 관련 자료
  • 히메유리평화기념자료관 자료
  • 야에야마 평화기념관 자료
  • 류큐신보 오키나와전 아카이브

《맛의 문명사》 오키나와 편과 함께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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