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시간의 알찬 소비 · 당신 주변의 변화를 관찰합니다
당신의 꿈과 희망은 무엇인가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가장 하고 싶었던 은퇴 후 ‘제주 집 앞마당에서의 커피 한 잔’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건축의 ‘건’자도 모르던 작가가 좌충우돌 10년간 제주에 집을 짓는다. 처음엔 도전이었던 것들이 어느새 즐거움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미래란 지치지 않고 두드리는 자들의 몫이 아닐지. 제주와 건축이 만났다. <쇼생크탈출>의 앤디처럼 교도소 아니 직장을 탈출해 낭만과 희망의 섬 제주에 꿈을 실현하기 위해 그곳에 자신만의 공간을 짓는 판교 직장인의 판타지 아닌 초리얼리티 이야기. 10년간의 여정은 마무리될 수 있을까. (2025년 브런치 연재)
“내가 잘리는 날이 온다면 그때가 제주로 떠나는 날 일 것이다”2016년. 그러니깐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제주에 땅을 얼떨결에 계약하고 우스개 소리로 이렇게 지껄였다.이런 생각에 미래가 든든하기도 했고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 대상이기도 했는데 농담처럼 하던 말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영화 <쇼생크 탈출>을 좋아한다. 감옥의 죄수들이 야외 근로를 나와 어느 건물 지붕 위에서 주인공 '앤디'의 활약으로 땡볕아래 시원한 맥주를 마시게 된다. 몇 년만일지도 모를 일이다. 앤디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작 앤디는 맥주를 마시지도 않는다. 영화 말미에 앤디가 감옥을 탈출하여 비를 맞으며 만세를 부르는 자유의 장면. 그리고 마지막 멕시코 어느 해안가에서 절친 '레드'를 기다리며 차분하게 배를 수리하고 있었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어쩌면 회사라는 감옥에서 자유를 향한 나의 갈망과도 같았다. 나도 제주의 어딘가에서 앤디처럼 인생의 후반부를 맞이할 수 있을까.엄청난 노력과 자금이 뒷받침된 것은 아니었다. 평범하다면 평범할 것이다. 그냥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부딪히니 문이 열였다고나 할까. 혼자였으면 절대 이루지 못했을 것도 같다. 출근길 버스 안에서 또는 판교의 눈부신 야근 빌딩을 바라보며 인생의 덧없음을 간간히 깨달을 때마다 더욱 박차를 가했던 것도 같다. 코로나 기간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란 스스로 물음에 나의 제주집 앞마당에서 한 잔의 커피를 마시겠다고 답했다.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집을 짓는 것이 익숙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생에 집 한 번 짓기가 쉬운 일인가. 누구나 건축주는 처음이니깐. 집을 짓는 꿈의 과정이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의 연속이었으면 했다. 삶에 파동이 있듯이 그 과정도 롤러코스터 같았다. 솔직히 고백한다.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같이 나에겐 힐링의 순간이 되기도 한 것 같다. 어느덧 나는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러 가는 주인공 '도로시'가 되어 있었다. 나의 친구들은 어디에 있을까.이 스토리는 집을 짓기 위한 지식을 얻기에는 부족할 수 있다. 집을 짓기에 충분한 이론적 기술적 지식이 담겨 있지는 않다. 이것은 꿈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판타지는 아닌 지독한 현실 고증 리얼리티다. 건축 지식이 전무했던 판교 IT 직장인이 지난 10년간 제주에 나만의 공간을 짓기 위해 좌충우돌했던 그 과정의 기록을 통해 한 번쯤 자신의 꿈을 위해 세상에 도전하고 푼 사람들에게 작은 용기와 희망을 주었으면 좋겠다.
처음 집을 짓겠다고 했을 때 그리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건축 지식은 전무했지만 주변에 집을 직접 짓는 사람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땅을 샀으니 당연히 집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일생에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집을 짓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꼬마빌딩이나 리모델링 등 곳곳에 공사현장은 많이 보이는데 도심에서 단독주택 건설현장을 보는 건 쉽지 않다. 실제 내가 만나봤던 건축사들을 봐도 단독주택 포트폴리오가 그렇게 많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건축사들은 주택이 건물보다 더 까다롭다고 했다. 아무래도 건물은 일하는 곳이고 주택은 생활하는 곳이니 디테일하게 신경 쓸 것이 많다고. 그래서 건물 평수보다 주택이 작다고 설계비가 비례하여 작아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집을 짓겠다고 건축사들을 만나 상담을 할 때 가장 처음에 듣는 질문은 바로 “어떤 집에서 살고 싶은가” 또는 “어떤 집을 짓고 싶은가”였다. 언젠가 추운 겨울 눈 내리는 일본의 홋카이도 어느 지역에 빵 냄새 솔솔 나던 오두막집을 지나갈 때 너무나 평온하고 따뜻해 나도 언젠가 저런 집을 짓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핀터레스트나 월간지에서 차갑고 스틸로 된 검은 인테리어를 보면서 세련된 무엇을 마음에 담기도 했던 것 같다. 가족이 행복한 집, 목가적 분위기의 조용한 집, 햇빛이 비치는 집, 아니 고급스러운 분위기도 좋고요. 넓었으면 좋은데 좁아도 상관없어요. 하늘이 보였으면 좋겠어요. 바닥엔 물이 흐르고요. 지붕도 열리면 좋겠네요. 또.십중팔구 건축사들은 당황한다. 어떤 건축사는 A4 수십 장으로 된 설문용지를 보내온 적도 있었다. 우리 가족의 형태를 치밀하게 관찰하려는 목적으로 보였다. 가족의 행태와 사람의 로망은 다를 진데 어떻게 맞춰가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난 그냥 집을 지으면 재미있겠다는 생각만 했지 꼭 집을 지어야 한다는 사명감 따위도 없긴 했다.나도 나를 모르겠어요집을 짓는다고 하면 주변에서 많은 의견을 접수하게 된다. 2층은 필요 없어요. 활용도가 매우 떨어져요. 목조주택은 방음이 안되고 2층에서 삐그덕 소리가 나요. 집 크게 지을 필요 없다. 관리하기 힘들다. 잔디 깔지 말아라. 보기엔 좋아도 그거 중노동이다. 일생에 한 번 짓는 집 제대로 지어야 한다 등등. 모두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내용들이다. 이러한 의견들을 모두 취합하다 보면 집은 너덜너덜 해질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정리가 안되어 집 짓는 일을 중단한 적도 있다.두 번째로 많이 받는 질문은 예산에 대한 부분이다. "얼마 예산으로 지으려고 하느냐" 또는 "몇 평짜리 집을 지으려고 하느냐"인데. 통장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얼마나 돈이 필요한지 알고 싶기도 했는데. 궁금한 점은 실제 다른 건축주는 가지고 있는 현금으로 집을 지을까? 몇 평을 원하는지 본인이 알고 있는 건축주는 얼마나 될까? 그런 걸 전혀 모르니 상담하고 협의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고 쫓아내지는 않는다. 세 번째로 많이 받은 질문은 구조, 재료, 공법에 대한 부분이었다. "어떤 재료의 집을 짓고 싶은지". 즉, 기본적으로 철근콘크리트, 목재, 철골 중 말이다. 나는 그저 춥지 않으면 좋겠어요. 이 또한 3가지 장단점에 대해서 명확하게 모르니 선호도를 말할 순 없었다. 가장 흔하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블로그나 유튜브 등에서 살펴보아도 너무 다양한 의견들이라 결론적으로 전문가가 결정해 주길 바랐다.가끔은 AI가 나를 인터뷰해서 예산과 평수 콘셉트 등 모든 것을 제안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건축사를 만날 때마다 난 더욱 작아져 있었다. 너무나 명쾌하게 콘셉트와 실행 안을 갖고 있는 건축주를 보면 부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건축주의 운명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자리라는 것을 안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것은 단지 설계 단계에서 뿐 아니라 건축의 전 과정에서 벌어진다. 나는 회사나 일상생활에서 결정장애를 갖고 있지 않다고 자부했으나 건축에 있어서는 무색무취였던 것 같다. 한 때는 공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들어가서 사는 사람이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부족하고 불편한 것이 있다면 그때그때 바꾸어 나가면 되지 않겠느냐란 생각. 그저 내 한 몸 누을 공간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언젠가 이런 얘기를 건축사에게 했는데 허탈한 웃음을 지으셨던 기억도 있다. 아마도 건축에 대한 지식이 없다 보니 비교분석 자체가 힘들어 결정을 내리기 힘들다고 볼 수 있겠다. 지식이 없다고 집을 짓는 것이 범죄는 아니지 않은가. 전문가만 집을 지으란 법도 없을 테니 말이다. 지식이 풍부하고 명확한 목적으로 효율적으로 집을 짓는다면 축복이겠지만 나처럼 이 혼돈의 과정을 해학과 웃음으로 잘 극복하고 즐길 수 있다면 그 또한 해볼 만한 작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결정장애는 부끄러운 것이 아닌 또 하나의 콘텐츠라 생각하기로 했다.나도 내가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제주라는 섬에 집을 지을 수 있을지 궁금하긴 했다.
좋은 건축사를 만나는 팁은 없다고 본다. 실제로 일해 보지 않고 자신과 맞는 건축사를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집을 짓는데 건축사는 필수이다. 일단 건축허가를 낼 때 건축사 자격증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나는 집을 짓기로 한 후 6명 건축사를 만났다. 물론 내 운동커뮤니티에 유독 건축 설계 쪽 분들이 많긴 했는데 나는 지인과 일하는 것이 부담이라 일부러 피했다. 6명을 동시에 만나 그중에 한 명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최근 2년간의 기간 동안 상담한 건축가들의 숫자다. 주변에서 건축사를 찾는 건 단순하기도 하고 단순하지 않기도 하다. 사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을 수도 있지만 주변에 건축 관련 종사자 한 명쯤은 있지 않겠는가. 변호사를 찾는 일과 비슷할 것 같다. 보통은 땅이나 건물을 계약한 부동산에서 많이 건축사를 추천해 주기도 한다고. 건축사를 고를 때 고민했던 부분 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지역적인 부분이었다. 내가 서울에 거주하니 설계과정에서 건축주와 많은 소통이 가능한 서울 지역 건축사와 실제 제주를 잘 알고 내가 자주 갈 수 없기에 현장에서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제주 지역 건축사 중 고민이 컸다. 나는 그중 설계의 디테일보다는 제주에서 원활한 활동이 가능한 현지 건축사를 먼저 만나보기로 했다.나는 실제 제주에서 집을 지은 지인에게 건축사 추천을 의뢰했다. 지인은 ‘허가방’이라고 해서 도면은 본인이 그리고 허가만 대행하는 건축사도 있다고 했다. 나는 실제 설계가 필요할 것 같아 지인 건축사 연락처를 받았다. 대략적인 설계비는 듣기도 했고 또 각종 건축 관련 책을 보면 평당 얼마라는 대략적인 단가가 나와있기도 했다. 해당 건축사와 연락 후 가족 여행을 핑계 삼아 제주에 가서 직접 사무실에 방문했다. 제주시내가 아닌 근교에 위치해 있었는데 사무실에 혼자 있었다. 자신의 포트폴리오도 대략적으로 설명하고 언제나 그렇듯 기본 3가지 질문에 대해 논의했던 것 같다. 나는 주로 듣는 입장이었는데 특히나 나의 땅이 권리관계가 복잡했는데 제주 건축사라 그런지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각종 법적 인허가 문제들을 능숙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말씀 주셨다. 그리고 본인은 더 많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직접 설계를 하지 않고 설계는 다른 곳에 외주로 요청한다고. 한 시간 정도의 미팅을 하고 나오면서 몇 가지 생각이 들었다. 홈페이지도 없는 이 설계사무소에서 했다는 그 포트폴리오는 실제 여기서 한 것일까. 나와 상담한 이 분은 실제 설계사 자격증을 갖고 있을까. 이 분을 뭘 믿고 수 억 원짜리 공사 계약을 할 수 있을까. 불안한 생각들이 엄습해 왔다. 실제로 집을 지은 지인들은 건축사에게 아쉬운 소리를 많이 했다.그들은 본인들의 살 집을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하려고 해실제 건축사이면서 자신이 설계한 집에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물론 건축사의 역할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다루기에 5년 이상을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들이다. 건축사들 중에도 스타일이 있다고 듣긴 했다. 미적인 면을 강조하는 사람과 튼튼하고 실용적인 면을 강조하는. 그 중간을 추구하는 건축사를 어떻게 고를 수 있다는 말인가. 단 한두 시간의 미팅으로 말이다.그 후 나는 서울 건축사를 소개받아 만나기도 했다. 설계비란 것이 부동산 소개비처럼 정해진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만난 6명의 설계사들과 논의한 설계비의 평균을 내보면 제주 설계비보다 서울 설계비가 최소 3배 이상이 비쌌다. 물론 내가 만난 건축사가 훌륭하신 분임은 분명할 것이다. 또한 세부적인 설계도 규모도 차이가 나긴 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금액 차이가 나는 점은 선 듯 이해하기 힘들었다.사실 설계비가 비싸다는 건 문제가 아니다. 그 값을 지불할 때 충분히 합당한 것인가가 중요할 것이다. 어찌 보면 건축비에서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는, 아니 건축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설계를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일은 건축의 성공에서 최소 50% 이상을 차지할 만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험난하고 난생 처음인 건축과정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축사를 만나는 건 축복이다. 설계비는 완공 후 만족감의 값어치이며 미래에 절약될 시행착오 비용까지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한 때 난 ‘설계도는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데 건축가의 역할이 필요하나’하는 어리석은 생각도 한 적이 있다. 건축가는 최고의 전략가이자 등불 같은 존재이다. 내가 건축의 바다에서 길을 잃거나 좌초되지 않도록 방향을 잡아주고 즐거운 항해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건축가는 결코 선장은 아니다. 물론 선장 역할도 해줄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굳이 집을 스스로 지을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훌륭한 건축가란 누구인가. 나는 나의 이 결정장애와 다양한 욕구를 잘 들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닌 함께 상상의 나래를 그리고 그 속에서 잘못된 부분은 지적하여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사람에 따라 성향에 따라 경험에 따라 필요한 건축사의 역할은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가장 절대적인 것은 지나칠 정도로 충분히(깨알같이) 의견을 나누는데 열려 있는 건축사는 실패할 확률이 적다고 본다.나는 결국 두 곳 설계사무소와 계약을 체결했다. 한 곳은 제주, 한 곳은 서울이었다. 서로 역할을 나누어 협력하여 진행하기로 했다. 어쩌면 일생에 가장 도전적인 건축이라는 행위에 대해 실패를 최소화할 여러 개의 완충지를 마련한 셈이었다. 비용에 대한 부담보다 결코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뒤에서 자세히 들려 드릴 예정이다.
‘평당 건축비는 의미 없다’란 얘기도 많이 들린다. 건축주가 어떤 재료 어떤 콘셉트를 차용하느냐에 따라 금액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당연한 얘기이다.처음 건축사 미팅을 할 때 예산을 물어보지만 당연 건축비를 예상할 수 없기에 대답할 수 없었다. 이때 준비해 간 워너비 콘셉트 사진들을 보여주면 그때 비로소 건축사는 본인의 포트폴리오 사례에서 비슷한 콘셉트의 사례를 들어 대략적인 평당 건축비를 말해준다. 참 신기한 광경이었다. 물론 모든 건축사가 이렇게 자판기처럼 건축비를 말씀해 주진 않는다. 건축주의 예산에 맞는 설계를 하겠다는 분도 계셨고 정확한 건축비는 시공사랑 협의하라는 분도 계셨다.내가 준비한 콘셉트 사진을 보고 건축사들은 모두가 평당 1000만 원 이상이 들 것이라 하였다. 나는 깜짝 놀랐는데 책에 있는 내용과 현저히 달랐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도서관 책을 참고하다 보니 출판된 지 꽤 지난 책들이 많았는데 책이란 매체는 실시간으로 현실을 반영하지는 못할 듯하다. 내가 본 책에는 평당 5~700만 원까지 다양했으나 건축사들은 입을 모아 최소 1000만 원을 이야기 했다. 이어 코로나 시기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자재비가 엄청나게 뛰었으며 인건비 또한 뛰었다고 입을 모았다. 더군다나 제주는 물류비가 추가로 든다고 하니 비용을 더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 만나 본 한 시공사는 30평 정도 주택에 콘크리트 치는데 1억은 든다고 해서 적잖이 충격을 먹기도 했다.“30평짜리 주택에 드는 시멘트 비용이 1억이라니!”여기서 건축비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부 설계가 끝나고 시공사로부터 견적을 받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때 세부적인 건축비 내역이 나와있다. 물론 직영공사와 종합건설사를 통한 공사에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 나는 여러 리스크를 고려해서 비용이 더 들더라도 안전한 종합건설사를 시공사로 선정했는데 견적서를 보고 약간 당황했다.일반적으로 공사비라 하면 자재비와 인건비가 거의 반반으로 보면 된다. 여기에 각종 공사 현장의 안전 등에 필요한 보험료가 10%가 추가되고 시공사의 이윤 10%가 추가된다. 다시 여기에 부가가치세 10%가 추가가 된다. 여기서 현타가 온 것은 공사비의 대부분은 재료비로 알고 있었던 나에게 재료비의 비중보다 인건비와 간접비의 비중이 더 크다는 데 있었다.공사비 = 재료비+인건비+간접비(재료+인건비의 10%)+이윤(재료+인건비의 10%)+부가세즉, 평당 1000만 원이라는 말속에는 재료비 400만 원, 인건비 400만 원, 간접비 80만 원, 건설사 이윤 80만 원 정도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부가세 및 인허가비 등 각종 세금이나 설계비는 제외된 금액이다. 물론 직영 공사를 시행한다면 부가세는 내야하겠지만 간접비나 건설사 이윤은 재료비에 비례하여 올라가진 않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 견적서를 살펴보면 철근 콘크리트 공사비 1억여 원 중 재료비가 5천만 원, 인건비가 5천만 원이었는데. 재료비 5천 중에서 시멘트 비용은 채 2천만 원도 안되었다. 약 1.5천만 원이 철근, 나머지 비용은 거푸집 등 공사를 위한 부대비용이었다. 물론 간접비는 이 금액에 20~30%를 더 고려해야 한다. 즉, 총 철근콘트리트 기초타설 비용 1억 중 시멘트는 20%인 2000만 원정도였다.여기서 공사비를 줄인다는 것은 재료비만이 변수로 작용한다. 즉, 재료비만 줄 일 수 있지 인건비를 마음대로 줄일 순 없다. 할 일의 양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실제 재료비 100만 원을 줄이면 인건비는 고정이고 간접비 30%인 약 30만 원 정도가 추가로 줄일 수 있는 것이다.여기서 건축주의 딜레마가 시작되는데 면적을 줄이지 않는 한 줄일 수 있는 건 마감 재료비뿐인데 일반적으로 시공사 견적에 대해 협상과 ‘네고’를 하는 과정에서 건축주가 선택한 창호, 타일, 페인트, 가구 인테리어 비용 등을 놓고 우선순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낮은 가격의 재료로 다운그레이드해야 한다.그런데 눈물을 머금고 금액을 낮춰봐야 전체 공사비에서 재료비로 낮출 수 있는 한도는 매우 제한적임에 절망하곤 했다.
코로나 시기에 재택근무를 하였다. 우리 회사가 그룹사 가운데 가장 빠르게 재택근무를 결정했다. 재택근무가 효율적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 같다. 또한 과연 모든 직원이 전원 재택근무가 가능할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직원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이유가 더 컸다. 고정관념을 바꿔보기로 한 것 같다. 안 되는 이유보다는 되기 위해서 무엇을 바꿔야 할지 논의해 보기로 했다. 신기하기도 절대 재택근무가 불가능하게 보였던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닭기도 했다. 어떤 부분에서는 매우 효율적이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아쉬웠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면 말이다.마치 세상이 망한 것처럼 모든 것이 공포였을 때 몇 가지 트렌드 변화가 감지됐다.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아내와 내가 함께 재택을 하다 보니 우리 네 식구가 함께 지내는 것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집에 사무환경을 만들다 보니 아내는 가구도 새로 구입하고 후다닥 을지로에 나가서 간접 조명 재료에 인부를 구해서 간단하지만 인테리어 공사도 수행했다. 이때였던 것 같다. 갑자기 내가 내일 죽는다면 가장 아쉬운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지구가 내일 멸망한다면 꼭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는데.바로 제주도 집 앞마당에서 아침 향 가득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모습이 떠올랐다. 땅을 구매한 지 꽤 되었는데 집을 언제쯤 지을 수 있을지 예측이 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건축 비용은 조만간 상장할 것으로 예측되는 회사 스톡옵션으로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을 했는데 문제는 건축이 완료 예정인 현재까지도 상장은 감감무소식이긴 하다. 당시엔 바로 건축사를 만나 상담하고 계약서도 오고 가고 했지만 치솟은 건축비와 결정장애로 몇 번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건축비가 내려가거나 콘셉트가 보다 명확해지면 다시 추진하기로 했다. 혹자는 오른 자재 및 인건비는 다시 내려가지 않으니 바로 지금이 가장 저렴한 때라고 말하기도 하였다.나는 회사에서 지금껏 콘텐츠를 다루는 일을 수행해 왔다. 콘텐츠는 다양한 분야를 다뤄왔는데 근래 들어서는 웹툰을 담당하고 있어 창작자와의 접촉도 빈번했다. 특히나 내가 아주 존경하고 저명한 만화가님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겨울 때쯤 이 분이 지방으로 작업실을 이전하게 되셔서 겸사겸사 찾아뵙게 되었다. 작품 활동은 물론 다양한 사업 특히 서울에서 공간을 운영하시며 여러 후배들에게 더 좋은 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계셨다. 이런저런 말씀을 듣다가 요즘 내가 고민하는 질문을 드리게 되었다.“작가님, 제가 저의 로망인 제주에 집을 짓고 싶은데. 건설자재비도 많이 오르고 지금은 때가 아닌 것도 같기도 하고 언제 지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작가님은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서울의 해당 공간을 매입했을 시 부동산시장이 안 좋을 때라고 하셨다. 주변에서 만류하기도 하셨는데 본인이 가장 좋아했던 거리에 마침 좋은 매물이 나왔기에 바로 결정할 수 있었다고. 결과적으로도 그때 선택이 옳은 선택이 됐다 하셨다.“무엇인가를 간절하게 하고자 할 때가 가장 적절한 시기가 아닐까요?”그때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 있었다. 미래에 건축비가 내려갈지 오히려 올라갈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본인이 하고자 하는 마음이 충만하다면 당시의 결정이 어떻든 미래에 가치 있는 것으로 바꾸어 나가는 건 본인의 역량일 것이다. 그동안 마음속에 무겁게 자리 잡았던 무엇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결론적으로 작가님이 구입한 공간(건물)은 작가님의 로망대로 운영되고 있어 그 어떤 물질적 가치보다 더욱 값어치 있을 것이다. 작가님은 바램은 완성이 아닌 현재 진행중이었고 그 최종 꿈은 더욱 더 커 보였다.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그것을 실현할 용기가 있다면 미래도 나의 길을 올바르게 인도하지 않을까. 이때를 기점으로 제주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내가 제주에 집을 짓겠다고 하면 대부분 질문이 제주에 내려가서 살 것이냐고 묻는다. 아내 하고도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는데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가족 전체가 내려가긴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다. 제주 공간은 일명 세컨드하우스로 자주 오가는 공간이 될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주변 사람들은 길거리에 돈을 버리는 행위다. 전원주택이 얼마나 팔기 어려운지 아느냐. 두 집 살림은 비용이 두 배로 든다는 둥 걱정을 말하곤 했다. 하지만 나에게 롤모델이 존재한다.회사가 합병으로 판교로 옮기기 전 한남동에 있었는데 바로 직전 H대 서울캠퍼스에 일부 사무실이 있었다. 이곳에는 마케팅과 디자인 부서 등 말랑말랑한 부서가 있었는데 난 마케팅 직군이라 당시 새롭게 건축한 이 대학 건물에 입주했었다. 당시 상암동 쪽에 살고 있어서 출퇴근 시간이 줄어들어 개인적으론 만족스러웠다. H 대는 입점업체 직원들에게 교직원에 준하는 다양한 혜택을 주었는데 교수식당도 애용할 수 있고 체육시설도 이용할 수 있었다. 지금은 없어진 학교 수영장을 입점업체 할인을 받아 이용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운동을 마치고 수영장을 나오는데 도사 같은 직원 어르신께서 갑자기 말을 붙이셨다.“자네 혹시 검도를 해 볼 생각이 있는가”검도? 그렇게 나의 검도인생이 시작되었다. 이 대학 사무실은 그 후 회사가 한남동에 큰 건물을 임대하면서 양재동과 대학 사무실을 통합하여 모두 이전하게 되었지만 H대 교검회 인연은 2010년부터 현재까지 약 15년 이상을 이어져오고 있다. 특히, 교검회는 이 학교 교수 및 직원 등이 소속되어 매일 아침 합동 운동을 했는데 이곳에 건축과 교수님들은 물론 졸업생들도 있어 자연스럽게 건축을 접하고 이들과의 교류가 가능하여 나에겐 행운이었다. 나는 검도도 열심히 수련했는데 3단 승단 시험을 앞두고 회사에서 안식휴가 4주 동안 매일 수련하여 승단에 통과하기도 하였다. 나중에 회사 합병 후에도 거의 매일 운동하고 판교까지 출근하는 일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는데 많은 사람이 놀라긴 했던 것 같다. 출근 시간이 비교적 자유스러워서 가능했을 수 있다. 검도회 교수님들 중에는 세컨드하우스를 가지고 계신 분들이 있어서 이 분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언제나 부러웠던 것 같다. 특히 한 교수님은 서울, 강원도, 남해안에 개인 공간을 두시고 세 곳을 번갈아 다니며 생활하셨다. 미술을 전공하신 분 답게 세컨드하우스 모두 감각이 대단하였다. 내가 제주에 세컨드하우스를 짓는다고 하니 교수님과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직접 본인의 세컨드하우스로 초대도 하셔서 가족들과 함께하기도 했다. 교수님은 “한 곳에서 사는 것보다 계절에 따라 다양한 곳에서 사는 삶이 나름 행복하다”고도 하셨다. 물론 단점도 존재한다고. 커피 머신도 최소 4개 - 교수님 작업실도 따로 있으시다-를 갖춰야 하는 등 생활비가 최소 2~3배가 더 들기도 한다. 또한 몇 시간씩 운전을 하며 이동하는 것이 약간 부담이긴 하지만 -요즘엔 KTX도 잘되어 있어 자주 애용하신다고-언젠가 자율주행이 현실화되면 물리적 거리는 큰 문제가 안 될 것이며 보다 만족할 만한 공간에서 사는 것이 더 중요한 때가 올 것이라고 하셨다. 특히 최근 지구 온난화가 심해지고 있는데 강원도 용평은 서울보다 10도 이상이 온도가 낮아 미래의 주거 대안이 될 수도 있다고 하셨다. 강원도의 자연환경과 평창 동계 올림픽 인프라를 저렴하게 활용할 수 있는데 겨울엔 크로스컨츄리, 여름엔 골프 등 끊임없는 자기 수행이 가능하다고 자랑이 끊이지 않으셨다. 집 앞마당에서 남해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교수님의 세컨드하우스 전경교수님의 남해안 주택은 멀리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의 집이다. 내가 전 세계에서 본 집들 중 최고의 경치를 자랑한다. 교수님은 정원도 손수 가꾸시고 내부 인테리어 가구도 조립하시는 등 하루하루가 허투루 지나치는 날은 없어 보였다. 은퇴 후에는 더욱 집 가꾸기에 매진하고 계셨다.“자네 제주 프로젝트 다음은 강원도 용평이네. 여름에 지낼 곳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공간에 대한 만족감과 끝없는 욕망. 어쩌면 나의 제주 프로젝트는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나는 제주에서 살아본 적이 있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2003년 전격적으로 제주 본사 이전을 결정했다. 당시 메일과 카페로 유명한 IT기업에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우리 부서 보스가 모든 인원을 다 불러 모아 어차피 가야 된다면 제일 먼저 가자며 본사 이전의 프런티어가 되자고 독려했다.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일이니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도 한데 그때 몇몇 여성 동료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던 것 같기도 하다. 난 이게 무슨 상황인지 한동안 얼떨떨하기도 했는데 시간이 좀 지나서 걱정보다는 말 그대로 아직은 혼자(싱글)이니 재미있는 도전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회사는 파격적이고 진심 어린 지원을 해주었다. 갑자기 바다 건너 섬에서 근무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누구도 경험 못한 일이었을테니. 간단한 짐을 가지고 내려갔던 제주에서의 첫날밤을 잊지 못한다. 저녁 달빛이 무척이나 밝았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회사 근방이긴 했는데 회사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도 몰랐고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다. 잠은 오지 않았으나 머리는 맑고 상쾌했던 걸로 기억한다.아침에 윈드서핑을 하고 출근하기도 했다업무 집중도는 매우 높았다. 딱히 일 이외에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밤에는 아는 사람도 아는 곳도 없기에 회사 동료들과 끼리끼리 모여 술을 마시는 것이 일상이었다. 팀원들은 가족과 같았다. 회사가 사전에 좋은 계약조건을 협상-회사는 직원들에게 체류비에 해당하는 지원금을 매월 지급하였다. 사실 회사에서 세끼 식사를 제공했기에 이 금액으로 한 달 생활이 가능할 정도였다-하여 모두들 같은 동네의 2~3군데 원룸에 분산되어 살았다. 마치 기숙사에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각자 방을 돌아다니며 매일 밤 술자리가 이어졌다. 제주의 정보는 주로 제주 이전 후 신규 채용된 동료를 통해 얻곤 했는데 휴식 시간이면 동료들을 둘러싸고 질문을 쏟아내곤 했다. “현지 사람들이 자주 가는 가장 핫한 술집은, 제주 젊은 사람들이 주로 소개팅하는 장소는, 저렴한 가족들이 자주 가는 바닷가 횟집은, 제주엔 없어 보이는 패밀리 레스토랑 느낌이 나는 식당은, 중고가전 및 가구를 구하는 방법은?” 각자 제주에서의 생활정보 등을 찾고 교환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재료를 함께 구매해 나눠 갖기 일 수였다. 솜씨 좋은 동료는 직접 반찬을 만들어 나눠주기도 했다. 당시에 위키나 공동 작업할 수 있는 작업도구들이 발달했다면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결혼을 한 동료들은 대부분 일단 혼자 내려와 있었다. 당장 가족이 내려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점차 가족이 내려오면서 회사 사택이 부족해졌고 제주 시내 아파트 전세에서 자리를 잡는 가족도 늘어났다. 당시 회사는 제주 빈집이 2000여 채나 된다며 집을 구매하는 것은 보수적으로 임하라고 제안했다. 이때 전혀 적응을 못 하거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극소수의 동료는 부서를 옮기거나 퇴사를 하기도 했다.제주는 참 추었다제주 이전 초기에 시내 영어회화학원에 등록했다. 공부에 대한 열망보다는 사실 제주 분들을 만나고 싶다는 의지가 더 강했다. 관광산업에 종사하는 분들이 많아서인지 면세점에 근무하는 분들이 많아 보였다. 더욱이 젊은 제주 친구들을 사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아침반을 선택한 후 기대는 여지없이 깨졌다. 아침반에 젊은 친구들은 거의 없었다. 실망도 잠시 아침반에서 너무나 좋은 제주 분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처음엔 무뚝뚝하고 차가워보였던 사람들이 마음을 여니 너무나 따뜻한 분들이셨다. 그들은 내가 제주에 잘 적응할 수 있겠끔 저녁 모임을 자주 가져주셨다. 독특한 제주만의 지인 결혼식에도 초대해 주셨고 한라산 등반도 같이 해 주시고 겨울이 춥다고 하니 집에 있던 난로까지 가져다 주셨다. 집 구하는데 제주의 역사적 풍수지리까지 설명해 주셨다. 지금도 그들의 친절과 배려를 잊을 수 없다. 나는 거의 유일하게 퇴근 후 약속이 있는 직원이 됐다. 간혹 제주가 예전의 귀향지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여기서 평생 살게 되는 걸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나중에는 제주에서 근무하고 싶은 사람들이 줄을 섰지만 당시 처음만 해도 그렇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나서 적응하고 정보가 충분하게 쌓이고 그리고 가족들의 새로운 삶이 펼쳐지면서 만족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솔로들에게 제주는 거친 곳이기도 했다. 정보와 트렌드에서 소외되고 뒤쳐지는 느낌이 나기도 했고 당시까지 스타벅스는 제주에 없었다. 어느 날 야근하다 스타벅스 커피가 너무나 먹고 싶어 당시 중문에 유일하게 있었던 ‘시애틀’ 에스프레소 전문점에 야근하다가 1시간가량 차 몰고 가 팀원들 커피를 배달해 오기도 했었다. 제주시내에도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 한 곳 있었는데. 기본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시럽이 들어가 있어 충격 먹었었다. 내가 시럽 빼달라고 안 했다는 이유로. 당시 여긴 시럽이 디폴트였다.6개월쯤 제주시내 원룸에 살다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영화에서만 보던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다. 이때부터 모험심 있는 직원은 산으로 바다로 이사를 떠났다. 허나 그 수가 많지는 않았다. 주말마다 집을 보러 다녔는데 제주의 특성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이사하는 연초 ‘신구간’이 아니면 물량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서귀포 등도 알아보기도 했는데 회사가 제주시라니 집주인이 말리기도 했다. 여기 살던 사람이 제주시에 직장을 얻어 나갔다고 어찌 제주시까지 출퇴근을 하냐고 하셨다. 서울에서 출퇴근은 왕복 2시간 넘는 게 기본이었는데. 제주는 한라산을 넘는다는 게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도 큰 벽으로 느껴지나 보다. 물론 나도 이제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지만. 내가 구한 집은 동쪽 조천의 단독주택이었다. 중산간에 위치했는데 주변은 귤밭이었고 조용하고 경치 좋은 곳이었다. 주인집은 옆에 함께 살았고 과거 펜션을 했던 4개 동을 ‘연세’-제주의 가장 일반적인 주거계약형태. 전세나 월세가 아닌 1년 치를 한꺼번에 낸다-를 주고 운영하고 있었다. 저녁때면 다른 동에 사는 분들과 술자리도 이어졌는데 하나 같이 육지를 떠나온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사연을 듣고 치유하고 한 분씩 다시 자신의 자리로 떠나곤 했다.당시 살던 중산간 조천집. 지금은 재건축으로 남아있지 않다.꿈같은 1년이 지나고 나도 중산간과 제주의 매서운 겨울을 경험하고 살기가 너무 험난하여 바닷가 쪽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눈이 많이 오는 날에는 집에도 못 가고 집에 있으면 나올 수 없는 날도 있었다. 이후 바닷가 쪽이 중산간보다 상대적으로 따뜻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함덕해수욕장에 자리를 틀었다. 이곳에서는 주인집 할머니가 사시고 맞은편 별채에 내가 살았는데 손자처럼 너무 잘 대해 주셨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앉고 나는 가스보일러가 있는 제주시 삼양해수욕장으로 옮겼다. 제주는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고 LPG 가스보일러를 쓰는데 이는 도심이나 신축의 경우고 아직 시골 쪽에는 기름보일러가 일반적이었다. 남들은 작은 기름차가 와서 한 드럼씩 넣는다고 하던데 왠지 큰돈 나가는 것이 싫었던 것 같다. 20리터 통 하나를 넣으면 1주일 정도 지낼 수 있었다. 처음에 한 통을 넣고 냉방에 이빠이 보일러를 틀고 다음날 새벽에 엔꼬가 나서 놀란 적도 있다. 이때부터 겨울에 집을 비울시에는 보일러를 끄기보다는 제일 약하게 틀고 간다. 겨울에 주말마다 기름통을 들고 한밤중에 기름 사러 다니는 것이 너무 애처로웠다. 추억이라면 추억이지만 제주의 겨울은 언제나 힘겨웠다. 제주살이 4년째 시내로 들어오니 시골 같은 낭만과 인연은 없었던 것 같다.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나는 단절되었다. 바다를 홀로 걷곤 했는데 그맘때쯤부터 바닷가에 새로운 카페들이 새로 생겨났던 것 같다.주말이면 제주 동쪽의 깊은 오름을 등반하며 바람과 대화하고 바닥에 누워 하늘을 보곤 했다. 어느 날이었다. 매서운 태풍이 지나간 다음날 그날도 홀로 오름에 올랐다. 나비가 살포시 내 어깨에 앉는 것이 아닌가. 그때의 충격은 또 잊을 수 없었다. 자연과 동화가 된 나는 이대로 결혼도 못하고 지구 표면에 찰싹 달라붙어 사라질 것 같은 공포감 같은 것을 느꼈다. 뒤처지는 건 아닌지. 아직 젊다고 생각했는데 생활에 안주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같이 근무했던 직원의 죽음 소식이 들려왔다. 회사에서 가장 어린 직원이었다. 당시 역사적인 태풍의 위력으로 급격하게 불어난 하천물에 자동차채로 휩쓸려 갔단다. 자연의 공포를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제주는 살기엔 힘겹고 가끔 와서 만끽해야 하는 곳이라 생각했다. 젊은 땐 치열하게 살고 늙어서 다시 돌아오기로. 그것이 내가 제주에 대한 감정이었다. 제주를 떠나 서울 조직으로 부서를 옮겼다. 2006년 겨울 제주로 이주한 지 4년 만이었다.
사실 제주도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이 있었다. 그건 바로 아내의 공감과 승낙이었다. 아내는 언제나 나를 존중하면서 많은 부분 동의해 주었지만 제주 건축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당장 그 많은 건축비는 어떻게 충당할 것이며 설령 집을 짓더라도 내려가서 살지도 않을 텐데 왜 무리를 해서 추진하느냐였다. 사실 아내의 동의 없이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나의 바람이자 로망의 실현임을 설득했는데 아내는 그건 알겠는데 그걸 지금 당장 추진하는데 회의적이었다. 나는 아내와 제주 땅에도 가보고 가족 제주 여행 때 관련자들도 만나면서 차근차근 마음을 열도록 하였다. 나중에 아내에게 언제 건축에 대해 마음을 열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몇 년 전 건축에 대해 물어보려고 아이들과 함께 옆집에 방문한 적이 있잖아. 거기에 쿠팡 배달이 오고 유치원 통학차량도 오는 것을 보고 여기가 오지는 아니구나 싶어서 집을 지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어”때로는 작은 사유 및 현장감이 타인의 마음을 바꾸는데 의외의 역할을 할 때도 있다. 아내에게 역할을 부여했다. 나는 전체적인 콘셉트와 인허가 그리고 공사비를 담당하고 세부 디테일한 부분은 아내에게 일임했다. 특히 인테리어에 대한 부분을 전적으로 일임했는데 아내는 마다하지 않았다. “블랙계열의 차가운 느낌보다는 따뜻한 밝은 색깔의 인테리어나 가구가 좋을 것 같아. 비용 이슈도 있으니 전체는 아닌 일부 포인트에는 좋은 원목을 사용했으면 해. 당신의 로망인 자쿠지는 관리 이슈로 히노끼를 깔 수는 없을 테고 이태리제의 히노끼 스타일 타일을 깔아주도록 하지. 힐링의 최고봉인 1인 암체어는 어떤 제품으로 할까. 한정된 예산에서 가장 알맞은 제품을 찾아봐야지!”외국계 IT 기업을 다니고 있는 아내는 여기에 ‘사물인터넷 (IOT)’ 기능까지 도입하여 서울에서도 집을 제어할 수 있는 부분까지도 고민을 하였다. 아무래도 세컨드하우스가 된다면 원격으로 방범, 온도, 습도 등 공간을 원격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 부분도 나보다 훨씬 뛰어났다. “중국산 제품들은 가격은 저렴하지만 우리나라 규격이나 시스템 연동에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그래서 국내 업체를 찾다가 괜찮은 업체가 있어서 장비 협찬을 해달라고 요청해 놓았어!”아내는 이를 위해 부랴부랴 공간에 대한 우리 인스타 계정을 개설하여 집 짓는 과정을 업데이트하기로 했다. 당시 팔로우 숫자는 한 자리 숫자였는데. 기대했던 협찬을 이뤄지지 않아 실망한 기색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전투적인 모습은 결혼 전에만 볼 수 있었는데 그 모습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아내 회사는 당시 스트레스 강도가 높아진 듯 보였다. 많이 지쳐 있다 생각했는데 인테리어 관련 자료 수집이나 검토 때는 눈이 반짝거렸다. 많이 피곤해도 알맞은 콘셉트이나 자료를 검색할 때는 밤을 새우기 일 수였다.고통스러울 것 같고 멀게만 보였던 제주의 프로젝트가 점점 구체화되어 가면서 우리는 이것을 통해 감히 해방감과 힐링을 느낄 수 있었다. 생활의 각종 현실에서 미래의 우리 보금자리를 꿈꾸며 설계하는 순간엔 다른 어느 걱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우리 집은 EBS의 ‘건축탐구 집’을 보고 건축 기법과 인테리어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것이 일상이 됐다. 건축 비용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유튜브에는 스스로 집을 수리하고 작은 공사도 구체적으로 할 수 있게 하는 동영상이 넘쳐나고 있다. 외장재 시행은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단열재는 일체형인지 분리형인지. 전혀 몰랐던 건축기법 등을 우리 설계도와 비교하면서 무엇이 최신 트렌드인지도 비교해 보았다. 아이들과도 자신이 원하는 공간과 또 다른 대안인 제주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나 : “제주의 공간은 어떤 부분이 반영됐으면 좋겠어?”초등 딸 : “동물들과 함께 살 수 있는 공간이면 좋겠어”중등 아들 : “잠을 자는데 방해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마당에서 충분히 생활할 수 있으면 해”물론 이들의 제안이 충분히 반영하기엔 현실적 제약이 많이 따랐다.나 : “만약 우리가 제주로 이사 간 다면 기대되는 부분은 무엇이야?”초등 딸 : “학원을 안 다녀도 되지 않을까. 방과 후에 바다에 나가서 놀면 좋겠어.”중등 아들 : “제주에 학원이 없어? 놀거리가 많았으면 하는데”경쟁 위주의 교육 현실에서 꿈을 실현시키고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는 기회는 아이들에게도 많은 고민을 할 수 있게 하지 않을까 한다. 첫째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강남으로 이사 왔는데 강남의 학구열은 무섭기까지 했다. 최대한 강남의 시스템에 도전해 보겠지만 꼭 이 방식이 유일한 방식이 아님을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다. 특히나 이를 통해 꿈을 실현해 나가는 것이 남들의 기준에 맞춰진 삶을 사는 것보다 더 가치 있음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어쩌면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서 구성원 간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으며 가족이 함께 한다는 건은 무엇인지 자기만의 독립된 공간은 어떠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사회가 하나의 방향으로 무작정 흘러가고 있을 때 우리는 한 발 떨어져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길 바랐다.
2000년 초반 서울 시내에 아파트를 구입했었다. 지나고 보면 부동산 대세상승 초기에 매매하여 결과적으로 현재 많이 오르긴 했다. 당시에도 아파트 고평가 논란이 있었지만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동네-상암월드컵경기장과 월드컵공원의 환경과 축구를 좋아해서 프로경기도 손쉽게 관람이 가능했다-를 좋아했었고 전세 기간이 끝나면 또 이사를 하는 것이 너무 소모적이었고 무엇보다 아파트 가격이 떨어지더라도 평생 살 생각이 있었다. 요즘말로 카드 현금서비스까지 받아가며 영끌하여 구매했었다. 이 수많은 도시의 집들 중에 내가 발 뻗고 누워도 뭐라 하지 않을 나만의 공간이 생겨서 감동했던 것 같다. 회사 출퇴근 강남까지 왕복 2시간이 걸리더라도 내 월급 통장에서 매월 대출이자가 나가더라도 말이다. 대출은 어느 순간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형, 저의 이웃이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2016년 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제주에서 셰프를 하고 있는 후배에게 전화가 왔는데 대뜸 이렇게 묻는다. 나는 뭔 소리라며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후배는 예전에 한 팀에서 근무하던 친구였다. 워낙 다재다능하고 붙임성 있어서 동생처럼 아끼면서 친해졌다. 회사를 퇴사하고 영화판에서도 일하고 몇 년 전에 셰프로 직업을 바꿨는데 얼마 전 제주로 아예 자리를 옮겨 일하고 있었다.“제주에 재미있는 마을을 만들려고요. 좀 전에 아주 매력적인 땅이 나왔는데 함께 마을을 가꿀 멤버들을 모집하고 있어요. 사실 땅이 좀 커서 몇 몇 이서 감당하기 어렵기도 하고요”땅을 계약할 계약금도 부족하다고 했다. 조금은 당혹스러웠지만 나는 땅을 보지도 않고 참여하기는 어려우니 급하면 계약금 일부를 빌려줄 수는 있고 아무래도 내가 땅을 보고 결정을 해야겠다고 했다. 후배는 마침 이번 주말에 마을 주민 회의를 열기로 했으니 참석하라고 했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날 저녁 아내와 협의 끝에 우리 네 가족 모두가 주말에 내려가기로 했다. 숙박은 마을 주민이자 현재 게스트하우스를 운영 중인 한 가족네 집에서 묶기로 했다. 숙박비는 필요 없고 맥주 좀 사 오라고 했다. 우리가 계약할 땅은 제주도 동쪽 끝쯤에 있었다. 다랑쉬오름 근방이었는데 그때쯤 제주 제2공항 얘기가 나올 때였다. 나는 제주 동쪽을 좋아하고 실제 살기도 했기에 대충 분위기는 예측 가능했다. 우리 멤버들은 각자 차를 끌고 현장으로 갔는데. 예측하긴 했지만 너무 산속으로 들어가니 아내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 무섭다고 했다. 아이들은 자동차 레이싱처럼 쿵쾅거리며 차가 달리는 것에 마냥 즐거워했던 것도 같다. 길은 1차선 도로밖에 없었다. 선두에서 신호하며 오른쪽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높은 풀숲을 헤치고 그곳에 당도하니 황홀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곳이 우리의 보금자리가 될 것이다. 구좌읍 다랑쉬오름 근처의 우리땅 전경. 당시 촬영한 사진.우리는 각자 하나의 아이템을 정해 가게를 내기로 했다. 게스트하우스를 하는 친구는 게스트하우스를, 셰프 후배는 레스토랑을, 나는 로망인 펍(PUB)을 운영하겠다고 말했다. 나머지 가족들도 하나씩 마음속에 하나의 공간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곳은 우리가 꿈꾸며 개척해 나가야 할 곳. 관광이 아닌 함께 소통할 여행의 목적지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사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땅마다 개발행위에 대한 다양한 제약들이 있었다. 땅을 구매할 때는 ‘토지이음(www.eum.go.kr)’에서 해당 지번을 검색하면 가능한 개발 범위를 파악할 수 있는데. 특히 제주는 자연경관보전 등으로 개발이 많이 엄격했다. 펍이나 레스토랑 등 아무 땅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수 있으니 잘 파악해 보아야 한다.저녁 회의에는 총 여섯 가족이 모두 모였다. 네 가족은 이미 제주에 살고 있었고 나와 다른 한 가족은 서울에 살고 있었다. 사실 여기 모인 가족 중 세 가족은 모두 예전에 같은 회사에 근무해서 이미 아는 사이였다. 나머지 세 가족도 후배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모두 젊고 매력적인 친구들로 보였다. 모두들 나의 참여에 대해 나의 결정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나도 확신이 없었고 아내와 충분한 상의가 없었지만 한 번 같이 가보자고 했다. 모두들 환호성을 지르며 축하의 말을 건네 왔다.“미래를 예측할 수 없지만 확률이 반반이라면 난 언제나 모험을 즐기는 결정을 해 왔네요. 함께 잘해봅시다. 어떤 경우라도 서로 멱살만 잡지 맙시다.”10여년전 함께 모여 늦은 밤까지 마을회의가 열렸다. 역사의 현장.동업이란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나도 잘 알고 있다. 특히 여섯 가구의 총의를 모아 의사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은 더욱 어려울 수 있다. 그때 생각한 것은 이렇게 어려운 과정 속에서 더 값진 결과물이 나올 수 있지 않을지. 지나고 보면 이런 순진한 생각이 앞으로 닥쳐올 다양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을까? 정답은 맞을 수도 아니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난 내 인생에서 벗어나기도 힘든 역사적인 결정을 한 것이다. 가끔은 후배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면 어땠을지 생각해 보기도 했다.준비도 없이 덜컥 계약을 해버렸다. 무난하게 진행될 거라 상상을 하지 않았지만 바로 시련이 닥칠지는 몰랐다. 돌이켜 보면 우린 토지 사기를 당한 것 같다. 나중에 토지 등기부등본을 떼어보니 우리에게 땅을 판 사람들은 매입한 지 1년도 안되어 급하게 우리에게 판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많은 차익을 얻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린 나름 저렴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저렴함에는 이유가 있었다.먼저 제주에서 게스트하우스를 하고 있던 가족은 빠르게 집을 짓고 싶어 했다. 그래서 솔선수범하여 마을 ‘대장’처럼 움직였다. 우리 땅은 종류가 ‘임야’였는데 꽤 산속 위치에 있는지라 아직 수도나 전기가 공급되지 못했다. 우선 수도와 전기를 끌어오는데 어느 정도의 비용이 드는지를 체크하고 동시에 건축 허가를 위해 해당 면사무소와 소통하고 있었는데 비보가 날아왔다. 급히 마을 회의가 온라인으로 열렸다.전기와 수도를 놓기 위해서는 멀리 1킬로 근방에서 끌어와야 하는데 비용이 적지는 않았다. 그래도 여섯 가구가 십시일반 하면 비용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었는데 문제는 끌어오는 방식이었다. 일반적으로 땅에 접해있는 1차선 도로 밑으로 끌어오면 되는데 그 중간에 무덤이 한 개가 있었다. 도로가 그 무덤을 피해서 휘어져 있었다. 대장이 면사무소에 확인 결과 도로 지적도와 현재 도로의 방향이 달라서 도로를 따라 끌어오려면 지적도와 똑같이 해놓으라고 했단다. 그 말인즉슨 무덤을 옮겨서 도로를 직선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인데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내가 잘못 들었나 했다. 무슨 본인들의 일을 일개 민원인들이 해결하라는 말인가. 우리는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무덤 주인을 찾았으나 주변 분들도 잘 모르는 눈치였고. 임의로 무덤을 옮길 순 없고 지역신문에 공고를 내고 몇 년 후에 임으로 이장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 방식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주인이 나타난다고 무덤이 옮겨질지도 만무하기 때문에 다른 방안을 찾아야 했다. 그것은 수도와 전기를 더 길어지지만 반대방향에서 쭉 돌아서 끌어오는 것인데. 이 경우 도로가 아닌 타인 명의 땅의 동의 및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해당 땅의 등기부등본을 떼어서 땅주인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데 모두들 외지인인 서울분들이었다. 우린 집을 지을 예정으로 전기와 수도가 꼭 필요한데 당신네 땅 옆으로 지나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 이럴경우 당신들도 수도와 전기를 이용할 수 있어 땅의 가치도 올라가니 나쁘지 않을 것이라 제안했다. 당연 받아드릴 것으로 예상했으나 결과는 딴판이었다. 해당 땅주인들은 모두 거절했고 오히려 땅을 사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린 당신 땅을 지나가는 그 부분만 땅을 매입하겠다고 했는데 그들은 모두 땅을 전체 구입하라는 얘기만 했다. 당혹의 연속이었다. 할 수 없이 또 다른 건너편 목장터 주인을 설득해 보기로 했다. 이 부분은 내가 맡아서 진행하기로 하고 해당 주인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정중하게 우리의 사정을 얘기했는데 이 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목장터에 실제 목장을 운영한다면 지목을 임야 등으로 바꿀 수도 있으니 우리가 목장을 대신 운영하겠다고 했는데. 서울에 살고 계셨던 그 분도 최종 거절하셨다. 그냥 땅을 우리가 산 가격으로 사라는 말씀만 남기시고 전화를 끊어버리셨다. 같은 분이신지는 서로 담당이 달라서 확인해 보지는 못 했다. 그렇게 우리의 첫 시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차라리 여기서 멈췄더라면 이 글도 써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나야 집 짓는 것이 급하지 않았고 당장 제주에 내려가 살 계획도 없긴 해서 한 동안은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계절이 바뀌고 가을쯤이었을 것이다. 후배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형님, 이번엔 서쪽입니다. 마침 좋은 땅이 저렴하게 나왔어요. 4미터 도로도 인접해 있고 집 짓는데 문제없다는 전언입니다!”어쩌면 이런 친구들이 있었기에 이 꿈을 지속 이뤄 나갔는지 모르겠다. 다시 온라인으로 마을 회의가 열렸다. 나는 좋은 땅인지는 알겠는데 땅값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물었다. 이 땅은 우리의 동쪽땅보다 훨씬 컸다. 대장은 동쪽 땅과 서쪽 땅 모두 담보대출을 받고 일부 여력 있는 집에서 추가로 현금을 낼 수 있다면 잔금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물론 우리가 실제 사용할 땅보다는 크기가 큰만큼 추가로 뜻을 같이하는 가족을 더 받아서 빠르게 대출들을 정리하자고 했다. 또한 현재 농지인 본 땅에 집을 짓기 위해서는 최소 1년간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함께 돌아가면서 농작물 관리를 하면 되지 않겠냐고. 일단 1년 후에 집을 짓는 건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고 공유되었다. 우리는 이제 농사까지 지어야 하냐며 한숨을 쉬기도 했지만 이내 뭘 심을지 서로 제안하기 바빴다. 이렇게 웃고 떠들며 진행해 보기로 만장일치로 되었는데. 이것 또한 시련의 시작이었다는 걸 이때는 당연히 몰랐다.이때 이슈가 발생했는데 농지는 원칙적으로 외지인이 소유할 수 없는데 가구당 1000평방미터(약 300평)까지는 주말농장용으로 소유가 가능하다. 그 이상 농지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농지취득증명원이 필요한데 어떻게 농사를 지을지 계획서를 제출해야 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물려주신 시골땅이 존재하여 주말농장용으로도 소유가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향후 남은 공용땅을 구매하기로 찜해 놓고 땅을 소유하지는 않기로 했다. 요즘은 주말농장용도 자신이 현재 살 고 있는 곳과의 거리제한이 있는 지자체도 있기에 농지를 구매하기에 앞서 이런 부분을 잘 점검해 보아야 한다.다음 해 농사를 지으러 여섯 가구가 다시 모였다. 사실 서울에 두 집 그리고 동쪽에도 다른 가족들이 살고 있기에 여섯 가구가 모두 모이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함께 농사를 짓기 위해 날을 정해 모였는데. 각자 농사일을 하기 위한 농사 복장을 갈아입고 함께 포즈를 취하자 웃기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감자를 심기로 했는데 대장이 어디선가 씨감자를 구해왔다. 감자를 수확하기 위해 감자 자체를 심는다는 건 처음 알았는데. 고랑을 만들고 그 사이에 하나하나 씨감자를 잘라서 넣고 다시 흙으로 덮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감자를 심고 그 위에 보온을 위해 검은색 비닐을 덮어야 된다는 걸 알았다. 얼마의 크기로 어떻게 덮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대충 덮어 놓기로 했다. 10여 명의 젊은 남녀 장정들이 반나절 일하니 어찌어찌 감자를 일정 구역에 다 심을 수 있었다. 이장님께서 실제 농사를 짓는지 실사도 나온다고 하니 대충 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 같았다. 실제 농작물을 도매 등으로 판매하는 단가를 알아보니 농사만으로 생활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는 농작물의 소비자 직접판매 및 마케팅이나 브랜딩을 통해 가치를 더하여 판매하는 길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들기도 했다. 감자는 이후 늦봄쯤 수확할 수 있었고 수확물을 6 등분하여 나눠 먹었다. 아마추어 농부들 솜씨 치고는 맛은 일품이었다.와랑마을 맴버들이 오랫만에 모여 공동 노동을 하고 있다그 후 날씨 좋은 늦여름엔 우리 땅에서 캠핑을 하였다. 이제 제주에 있는 일부 용사들은 집을 우리 땅 근처로 이주했고 한 명은 농부가 됐고 한 명은 목공 실력을 발휘하고자 공방을 열기도 했다. 특히 프로그래머였던 한 집에서 농부가 되겠다고 선언했는데 우리는 그의 도전에 환호했었다. 아쉽게도 지금은 농사일을 그만두고 다시 프로그래머의 길로 살고 있다. 그만큼 농사일은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또 목공방에서는 가구들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고 간단한 집수리는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목공방은 지금은 더욱 커져서 조립식 목조주택을 만드는 큰 곳으로 성장까지 하게 되었다. 지자체의 젊은 농부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과정과 지원사업이 많았는데 모두들 제2의 인생을 꿈꾸고 있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캠핑 장소에는 큰 천막도 설치되었고 한쪽 편에는 재래식 화장실도 준비되어 있었다. 농사를 짓던 곳이라 농업용수 시설도 되어 있어 설거지 등 세면 시설도 완비되어 있었다. 캠핑을 싫어하던 우리 가족도 날씨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함께하는 캠핑을 너무 즐거워했다. 우리는 마을 이름을 ‘와랑’마을이라고 정했는데 제주 방언으로 ‘여럿이 모여 왁자지껄하다’란 뜻으로 우리의 모습과 딱 맞는다고 생각했다. 주변은 민가가 하나도 없는 모두 농지로 아무런 소음도 들을 수 없었고 달빛이 너무나 밝아 밤하늘에 별들이 눈부셨던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집 짓는 이야기는 도대체 언제 시작하냐고 묻는다면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1년간의 농사짓기가 끝났지만 모두들 생활전선에서 고군분투 중이었다. 그저 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더욱이 팬데믹이 닥치면서 사람들 간의 교류도 부담스러운 세상이 되었다. 땅을 구입한 지 5년이 지난 어느 날 인스타를 통해 대장이 소식을 알려왔다. 40여 평 집 짓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와랑 마을의 1호 집이 된 대장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없지 않았을까. 대장은 목수가 되어 목재로 집을 직접 만들고 있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아무래도 손재주가 뛰어나서 설계부터 시공까지 직영으로 직접 진두지휘를 했기 때문에 전체 공사비를 줄이면서도 인테리어 디테일 등이 뛰어난 집을 지을 수 있었다. 2021년 코로나 5인 이상 집합금지가 풀리자마자 1호 집에서 간단한 파티가 열렸다. 이때를 맞춰 가족여행 기간을 정했고 각자 먹을 음식들을 준비하여 모이기로 했다. 나는 축하 와인과 함께 숙소 근처에서 족발을 사갔다. 첫 번째 마루타가 되었기에 실질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인터넷 회선이 들어오지 않아 위성 인터넷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어 로망이었던 자쿠지를 완성 못한 아쉬움, 제주에 살기에 생존을 위한 좀 더 큰 팬트리(저장공간) 필요성 등 목재로 직접 지은 1호 집. 1년여에 걸쳐 장인정신으로 지었다집은 ㄷ자 모양으로 중간에 로망인 자쿠지를 생각했었지만 끝내 완성시키지 못했다. 남향엔 부엌과 거실을 배치하고 북쪽으로 방을 배치했다. 출입구를 서쪽 ㄷ자 왼쪽에 배치했는데 아무래도 출입문도 목재로 제작해서 그런지 빛을 가장 피할 수 있는 방향으로 고민한 게 아닌가 싶었다. 낮에는 주택목수로서, 밤에는 가구목수로서 지난 1년여간을 살았던 대장에게 경의를 표한다. 많은 자극을 받은 나는 구체적인 꿈을 다시 꿔보기로 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주에서 농부의 삶을 살기로 와랑 농부에게서 2호 집 준비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 차근차근 건축이 시작되고 있었다.첫 번째 좌절 : 무지함다시 육지로 돌아온 다음날 아침 검도를 끝낸 후 건축과 교수님께 제주에 집을 짓기로 했다고 말씀드렸다. 교수님은 집을 지으면 10년이 늙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 어려운 걸 하려고 하느냐고 물으셨고 어려워도 해보기로 했다고 말씀드렸다. 교수님은 집은 한 번 짓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집의 재료들이 몇 년간에 걸쳐 수축과 팽창 그리고 땅에 자리 잡게 되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라 말씀 주셨다. 기존 집터가 아닌 농지에 건축물을 올리는 것은 물길도 새로 내야 하고 쉽지 않은 일이라며 평생 한 번 짓게 될 텐데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훌륭한 건축가와 작업해 보라며 제자 한 분을 소개해 주셨다. 나는 그때까지 건축사는 모든 집 짓는 과정을 다 알아서 해주는 소위 '건축대행사'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토지매매, 소유권이전, 건축설계, 건축허가 그리고 시공까지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할 줄 알았는데 여기서 나의 현타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소개받은 건축사님도 몇 번 운동도 같이 해서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업무적으로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첫 미팅에서부터 어떤 집에 살고 싶은지 설문조사 같은 두꺼운 자료를 주셔서 열심히 작성하긴 했는데. 사실 문서로 작성하기에 앞서 내가 뭘 원하는지도 잘 모르긴 했다. 그냥 인스타나 핀터레스트에서 보아온 멋진 사진들을 모아 둔 것이 전부이긴 했다. 토지에 건축물을 짓기 위해서는 연건평, 건폐율이란 개념이 있는데 우리 땅은 계획관리지역으로 연건평이 최대 40%이고 건폐율은 80%라고 한다. 이것도 토지이음에 검색하면 나온다. 몇 평짜리 집을 지을 것인지는 이때까지도 딱히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왕이면 크면 좋지 않겠나. 나의 로망일진대. 100평 얘기도 나눴던 것 같다. 와랑마을 1,2호 모두 목재로 지었기에 당연 목재로 지어야겠다 생각했는데 교수님은 물론 건축사도 모두 말리셨다. 목재는 기술이 최근 발달하긴 했으나 제주처럼 습도가 높은 곳에서는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제주에는 시공 전문가들이 아무래도 부족하여 완성도를 위해 서울 기술자들을 초청해야 할 수도 있고 시공사도 믿을만한 서울의 종합건설사 등을 섭외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건축사님은 대략적인 전체 건축비 규모를 말씀해 주셨는데 그때도 바로 현타가 온 듯하다. ‘집 짓는데 이렇게 돈이 많이 든다고? 그리고 시공사 선정은 내가 하는 것이라고? 설계와 시공이 다른 거였어?’ 시공에 대해 아무 지식도 없는데 어떻게 건설사를 선정할 수 있을까. 그전에 각종 민원 처리관련해서도 건축주 스스로 해야 한다고 하니 서울과 제주를 한없이 오갈 수 없는데 덜컹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하고야 말았다. 더욱이 당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자재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뛰어오르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리니 이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 가늠이 되지도 않았다. 1호 집 건축비에서 거의 3배 이상이 오른 상황이 야속하기만 했다. 건축사님에겐 죄송하지만 일단 내가 건축에 대해 지식 습득과 생각의 정리가 더 필요하다고 말씀드리며 최초의 시도를 잠시 접어야 했다.두 번째 좌절 : 무식함이는 나의 멍청함과 관련 깊다. 시간이 흘러 2호 집 완공 소식이 들려왔고 나도 슬슬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때 건축사를 다시 찾은 것이 아니라 싸게만 짓기 위해 집 잘 지어주는 똘똘하고 죽이 잘 맞는 업체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스타에 제주 건축이란 키워드로 검색하여 해당 업체들을 모두 팔로우하고 있었는데 한 업체가 눈에 들어왔다. 이때의 감성은 약간 일본풍 다다미집 형태를 선호하고 있었는데 그 느낌을 잘 표현하는 업체였다. 나는 인스타 DM을 보내고 마침 2호 집 탐방을 위한 제주 가족 여행 기간인데 가능하다면 이때 만나 뵙고 싶다고 했다. 연락이 닿았고 우리 땅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 분들은 주로 제주 서쪽지역 집을 짓는다고 얘기했는데 당시에는 몰랐지만 결국 시공업체였다. 이 분들은 설계도가 있는지를 물었는데 나는 이때까지도 원스톱서비스를 원했고 설계까지 다 해달라고 말씀드렸다. 이 분들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설계는 잘 아는 업체가 있어 외주로 진행하면 된다고 했다.제주 업체였지만 젊고 감각 있어 보였고 1,2호 집 짓는 과정에서 제주 현지 업체 및 인력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는 얘기를 들어서 오히려 서울이 아닌 제주 업체가 진행하는 것이 더 맞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공사현장에 자주 올 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업체도 굳이 내려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작은 집이라 그리 복잡한 것이 없다고도 했다. 나는 이제 사장님만 믿겠다며 설계 회의를 바로 진행했고 동시에 건축허가 관련 문제가 없을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사장님은 자신들은 시공사라 건축허가를 직접 진행해 보지 않았지만 바로 면사무소로 알아보겠다고 했다. 이후 우리는 화상회의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집에 대해 설명하고 논의했다. 당연히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콘셉트는 명확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때 항상 나의 머리를 맴도는 것은 멋진 집을 짓느냐 아니면 그냥 소소한 집을 짓느냐로 갈등하고 있었다. 멋진 집이란 자금을 많이 투여하여 고급스럽게 지어 이것을 되팔거나 나중에 에어비앤비로 활용하더라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수준. 소소하게 짓는다는 것은 그냥 최소의 비용으로 짓고 나서 향후 한 땀 한 땀 스스로 고쳐 나가겠다는 것으로 사업적 가치는 없는 그냥 나만의 보금자리일 뿐일 것이다. 주변에 많은 의견을 듣고 결국은 최소한으로 짓고 처음부터 많은 투자를 하지 않기로 했다.그리고 이맘때쯤 TV에 자주 나오시던 저명하신 건축사분도 소개받아 많은 인사이트를 받았다. 특히 만나기 전에 이 분이 쓰신 책을 읽어봤는데 이런 말씀이 인상적이었다.현재 우리들은 필요 이상의 공간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10여 평의 작은 집에서 한 가족이 아무 문제 없이 살았듯이 공간을 잘 활용한다면 물리적으로 적은 공간이란 의외로 적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 나의 서울 집도 당시에는 40평대 아파트였고 이후 30평으로 이사 가긴 했지만 30평도 네 가족이 쓰기에 좁지 않았다. 특히 거실에 너무 큰 소파가 자리 잡고 쓸데없이 구석에 남겨진 가구나 장난감 등이 집의 몇 평을 차지하고 있으니 이들을 줄인다면 더 작은 집에서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제주의 집은 최소한으로 작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은 20평대의 작은 집이었다. 허나 최소한 건축면적이 10%여서 최소 30평 이상을 지어야 했는데 여기서도 나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굳이 방이 클 필요는 없이 잠만 잘 수 있는 크기, 쓸데없이 거실도 없애고 키친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20평이어도 적지 않은 공간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30평까지 어떻게 늘려야 할까. 또 하나의 로망이었던 폴딩도어를 설치하여 여름에는 모든 문을 열어놓아 마치 야외에 살고 있는 느낌으로 변신할 수 있는- 이 로망은 제주의 벌레습격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작은 평수로 출발하지만 이후 수영장 등 놀이시설, 검도도 할 수 있는 체육관, 하몽이나 빵 등을 저장하거나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공방 등 향후 차근차근 공간을 확장하면 어떨지. 그리고 궁극적으론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공간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 나는 이 프로젝의 이름을 ‘제주 트랜스포머’라고 이름 짓기로 했다. 허나 이 모든 것은 건축비용이란 현실에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이제 구체적으로 건축비에 대해 얘기를 해 본다면 1호 집은 목조주택이었는데 평당 500만 원 이하였던 것 같다. 이는 대장이 직접 집 짓는 작업에 투입되어 본인의 인건비를 뺀 금액으로 봐야 하고 전쟁 이전이었기에 이론적으로 이 정도 가격이 가능했던 때였다. 2호 집은 전쟁의 직격탄을 맞긴 했는데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긴 힘들지만 40평대 목재 소재로 평당 800만 원 정도로 예측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목재가 아닌 좀 더 비싼 철근콘크리트이고 자재비는 더 올랐기에 평당 천만 원은 잡아야 하나 생각했다. 시공사 사장님이 거듭 예산을 물어보셔서 그리 얘기했는데. 작은 한숨을 쉬시면서 넉넉한 비용은 아니기에 함께 잘해보자고 하셨다. 사실 이 정도 비용도 현금으로 한 푼도 갖고 있지 않았다. 모두 대출을 통해 어떡해서든지 자금을 마련해 볼 생각이었고 부족하다면 현재 갖고 있던 얼마 되지는 않는 각종 주식을 처분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비용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시공사 사장님께서 긴급하게 연락이 오셨다. 이전에 건축허가 관련해서 면사무소랑 얘기한 적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당연하게 연락한 적도 없고 단지, 우리 집 근처 1,2호 집이 모두 건축허가 – 이들도 쉽진 않았지만 – 났으니 별 일 있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사장님은 몇 가지 이슈가 있긴 하지만 가장 큰 것이 현재 동네에 물이 부족하여 수압이 낮은데 건축을 하려면 1킬로 근방에서 수도를 당겨와야 한단다. 그런데 그 금액이 미터당 7만 원 정도 드니 7천만 원에 육박할 것이라고 걱정하셨다. 나는 무슨 소리냐며 2호 집이 몇 달 전에 허가받을 때는 그런 일도 없었고 물만 잘 나온다는데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사장님은 자신은 실제 건축주가 아니라 항의하는데 한계가 있으니 직접 면사무소 수도담당자와 협의해 달라고 하셨다. 결국 원스톱서비스는 진정 어렵다는 걸 깨달았고 전화보다는 직접 담당자를 만나기로 하고 제주행 티켓을 예약했다.시공사 사장님을 만나보긴 했지만 실제 존재하는 회사인지 등도 확인할 겸 겸사겸사 시공사 사무실도 방문해 보기로 했다. 제주공항에 도착하여 9시 출근시간까지 면사무소에 방문하기란 쉽지 않았다. 오전 7시 비행기를 타고 8시쯤 공항에 내려 시외버스를 타고 서쪽 끝까지 가면 1시간이 넘게 걸린다. 아마도 출근시간이기 때문인지도. 자주 내려가다 보니 요즘엔 비수기 평일 렌터카를 무보험-각자 알맞게 판단하세요-으로 빌리면 편도 택시비 가격으로 렌트를 할 수 있었다. 사장님께 면사무소 담당자 미팅 어레인지를 부탁드렸는데. 공항에 내려 연락을 드리니 약속을 못 잡았다고 한다. 담당자가 자꾸만 피하는지 자리에 없다는 메시지만 남기고 있다고. 일단 면사무소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때까지 담당자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일단 사무실로 이동하기로 하고 이후 진행에 대해 협의를 진행했다.설계는 외주 설계사무소를 소개해 주기로 했는데 비용은 서울 설계사무소의 3분의 1도 되지 않았다. 대략 허가를 위한 기본적인 도면만을 그려준다고. 그 정도 설계도가 있으면 시공 쪽에서 3D 작업과 긴밀한 협의를 통해 현장에서 세부적으로 작업하는데 문제없다고. 카톡방을 만들어 그때그때 협의해서 진행하면 된다고 하셨다. 사실 당시에는 그렇게 진행하는 것이 현실적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공사를 위해서는 현장 협의가 필요 없을 정도의 세부설계도 여부에 따라 현장에서의 일종의 애드리브 없이 철저하게 계획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 정석이자 바람직하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사장님은 설계가 나오면 비로소 자신들과 계약을 맺게 되는데 계약금은 약 천만원정도로 시작하고 이후 공정에 따라 3등분으로 나눠 공사대금을 지급하면 된다고 했다. 자신들의 강점은 설계와 시공을 동시에 고려하여 진행되기에 현실에 기반하지 않는 건축사의 설계를 비용이 최소한으로 들 수 있도록 사전에 협의가 가능하기에 더욱 효과적이라고 말씀하셨다. 오늘의 목적은 사실 면사무소 담당자 미팅보다는 – 당시에는 전화로 협의해도 되겠지 생각했다 - 시공사를 알아본다는 의미가 더 강했는데 어찌 됐건 사장님과의 미팅은 잘 끝난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 돼서 나는 면사무소에 가보기로 했다. 혹시나 담당자가 잠시 사무실에 들어온다면 약속을 잡지는 못했지만 얘기해 볼 생각이었다. 그냥 무턱대고 비행기 시간 – 나의 제주행은 대부분 당일치기였다 – 까지 시간이 남아있으니 기다려볼 생각이었다. 면사무소 근처에서 간단히 혼밥을 했는데 아무 곳이나 들어간 해장국 맛이 너무 맛있었다.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면사무소에 찾아가 담당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사무실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재빨리 달려가서 수도 문제 때문에 왔다고 했다. 하도 연락을 했더니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는데 그분의 말씀은 냉정했다. 나는 올해 옆집은 어찌 허가를 내준 거냐. 그리고 작은 집인데 그게 그리 수압에 영향을 미치겠냐. 이건 건축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냐고 설득했다. 그는 이미 다 얘기했고 본인이 허가를 내줘 수압이 낮아지면 책임져야 하는데 못한다. 멀리서 끌어와서 진행하면 된다고 얘기하며 본인은 외근이 있으니 나가야 한다고 했다. 정말 2분 정도 서서 얘기했던 것 같다. 매우 불쾌한 경험이었다. 왜 제주도 물이 부족한 문제를 내가 해결해야 하는지. 이곳에 집을 지어 마을을 좀 더 풍성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왜 마다하는지. 나는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공사 사장님께 전화를 걸어 정중하게 사과를 드렸다. 당장 진행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지자체에서 수도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하거나 면사무소 담당자가 교체되거나 – 간혹 담당자가 교체되면 기준이 달라진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담당자는 몇 년주기로 바뀐다-해야 진행될 수 있을 것 같다며 그런 때가 오면 다시 연락드리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와랑마을 단톡방에서도 건축 진행이 수도 문제로 홀딩되었다고 공유했고 몇몇 가족들도 함께 분노해 주었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좌절이었다.이맘때쯤 와랑마을 여섯 가구 중 서울에 살고 있는 다른 한 명과 점심식사를 같이 했다. 같은 회사에 있다가 오래전 통신회사로 이직하여 자주 만나기는 힘들었다. 같은 판교에 근무하지만 오랜만에 시간을 내었다. 참 와랑마을에서 호칭은 각자 본인이 소개한 애칭으로 불렸는데 나는 한스였다. “한스, 여하튼 대단하네. 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내가 이 친구를 와랑마을로 이끌었다. 이 친구도 당시에는 와랑마을의 분위기나 방향성에 매력을 느껴 참여했고 언제나 현금으로만 참여-대출이 없는 깨끗한 친구였다- 하여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친구는 몇 년 전에 경기도 인근에 전원주택을 구매하여 주말마다 살고 있다고 했다. 특히 코로나 기간에는 아예 전원주택에서 맘 편하게 근무하기도 했단다. 다시 제주에 건축을 하기가 엄두가 안 난다며 당분간은 쉽지 않을 것이라며 행운을 빈다고 했다. 사실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몇 년간 집을 짓지도 못하고 토지를 활용도 하지 못하여 자금이 묶여있었다. 남은 토지를 팔려고 부동산에도 올리고 부동산 카페에도 올렸는데 우리는 그냥 비싼 가격에 팔기보다 우리와 함께 마을을 가꿀 가족을 원했기에 전원 동의 원칙하에 실제 면접도 보곤 했다. 제주에 즐거운 실험을 하기 위한 다양한 가족이 참여를 원하고 실제 만나도 보았지만 최종 계약 단계에서는 주저하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직까지 남은 땅을 처분하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정부에 토지를 활용하기 위한 정부지원사업도 지원해 보고 부가가치 향상을 위한 고민도 했지만 실제로 실행까지는 각자 나름의 사연들이 많아서 쉽지 않았다.
그냥 포기하려고 했다. 수년간 할까 말까 마음만 졸이던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니 한껏 가벼워진 것도 같았지만 마음 한 편은 아쉬움이 밀려오긴 했다. 몇 달 정도가 지나 찬바람 불 때였는데 아침에 대장에게 전화가 왔다.“형님, 건축허가 내시랍니다. 내시면 됩니다!”어리둥절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자초지종은 이렇다. 대장도 원래 추가 건축을 고려 중이었는데 내가 동네 물이 부족하여 허가받기 실패했다는 소리에 담당 공무원을 찾아가 상황을 알아봤고 담당자가 나와 대장의 건축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단다. 아니, 난 안되는데 어찌 자네는 그리 쉽게 되는지. 대장은 웃으면서 제주 사람끼리 통하는 것이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대장의 전화에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바로 시공사 사장님께 전화드려 다시 시작하겠다고 했다. 사장님은 바로 건축사를 연결시켜 주었다. 나는 굳이 건축사를 직접 소통해야 할 필요성을 모르겠다며 그냥 사장님이 직접 건축사와 소통해 달라고 말씀드렸다. 나의 의도는 소통창구를 일원화하고 설계와 시공이 충분히 협력하길 바랐다.나는 시공사 사장님께 파워포인트로 전반적인 내가 생각하는 구조 및 스타일을 정리해서 보냈다. 전체적인 공사비 규모를 알려줬는데 결국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구현하기는 어렵다는 결과에 도달하였다. 어쩔 수 없이 단계별로 진행하기로 했다. 1차적으로 주택 1동을 짓고 이후 체육관이나 뭔가를 만들 수 있는 창고형 건물은 2차 그리고 수영장 등 놀이공간을 3차로 하여 진행하기로 했는데. 지금 설계해 봐야 그때는 많은 것들이 변경될 수 있고 설계비도 큰 차이가 없으니 모든 공정은 1차에 맞추기로 했다.초반 나왔던 평면도. 지금이랑은 완전 다르다.며칠 후 1차 설계 평면도가 도착했다. 1차 평면도를 받으니 이제 진짜 뭔가 진행되는 느낌이다. 평면도도 나름 나쁘지 않았는데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엌이나 욕실이 북쪽에 배치되어 햇빛을 잘 받는 남쪽 배치를 요청했다. 설계 쪽에선 일반적으로 욕실은 프라이빗하여 북쪽에 배치했는데 그럼에도 나는 볕이 잘 드는 욕실을 포기할 수 없었다. 몇 번의 간단한 수정 후 2차 도면이 도착했다. 남쪽에 부엌과 욕실이 크게 배치되니 좀 어색하긴 했으나 나름 원하는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설계 측에서 3D 모델링을 보내왔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평면도를 3D로 모델링을 하니 그 느낌이 완전 달랐다.평면도에서는 잘 몰랐는데 공간을 3D로 살펴보니 너무 답답했다. 로망 중 하나인 층고를 5미터까지 높였는데 너무 썰렁하고 시공사는 필요 이상으로 층고가 높으니 공사비도 많이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또한 남쪽 거실에 폴딩 도어를 설치했는데 제주에서는 태풍이 심하여 틈새로 물이 차 들어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방들의 벽 때문에 그렇잖아도 크지 않은 실내가 더욱 촘촘해 보였다. 모든 것이 내가 생각했던 그 느낌이 아니었다. 딱히 맘에 들지 않는데 이걸 어떻게 수정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었다.구세주의 등장아침에 검도를 마치고 커피타임 시간이 됐다. 함께 운동했던 다른 설계사무소 대표님이 내가 표정이 안 좋다며 무슨 일인지 물으셨다. 나는 지금까지의 건축 진행사항을 말씀드리고 평면도를 보여드렸는데 돌아온 건 호통이었다.“도면을 보니 뭘 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아무런 특징도 없고 왜 집을 지으려는 건지 어떤 의도도 느껴지지가 않는다. 네가 로망이라고 하니 그냥 지나치지 못하겠다"나도 웬만하면 지인들과 엮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도움이 절실했다. 대표님은 내가 설계사와 직접 소통하지 않는다고 하니 너무나 놀라셨다. 건축설계와 시공은 상호보완적인 동시에 긴장관계라고도 하셨다. 특히, 설계자의 의도가 있을 텐데 시공 쪽에서 비용 때문에 설계를 고치고 있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후 건축 자재 등 비용측면에서 건축설계의 역할이 중요하니 당장 설계사님께 연락하고 직접 소통하라고 하셨다. 나도 뭔가 어려운 점은 시공사 사장님은 정말 열정적이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의심한 적은 없지만 그의 말을 모두 믿어야 할지 몰랐다. 비용을 줄 일 수 있는 현장 노하우는 많아 보이는데 내가 기본 지식들이 부족하니 이것을 검증할 방법은 현재로선 없어 보였다. 누군가 상호 체크를 해줬으면 했는데 그때 대표님이 어렵게 말씀을 꺼내셨다.“나도 매우 조심스럽긴 한데. 지금 어느 정도 진행된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대표님은 어떤 식으로든 내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막고 싶었나 보다. 나도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집 짓는 과정은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을 선사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나는 집 짓는 과정을 끝없는 투쟁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쩌면 대표님과 함께라면 이 과정이 즐거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대표님은 이미 베테랑 건축설계사로 검증된 분이며 대학에서 학생들도 가르치고 있었는데 설계비용도 매우 높은 것으로 알고 있다. 매우 타이트한 건축비용에서 엄청난 추가 설계비용까지 더해지는 것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중에 적은 확률로라도 시공 쪽에서 추가 건축비를 요구한다면? 아니 나중에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면 처음부터 대표님과 철저하게 준비하며 진행한다면 미래의 리스크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보통 건축비는 마지막에 추가되는 비용이 많다고 하는데 이것을 줄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며칠을 고민하다 대표님을 찾아뵈었다. 대표님은 나의 사정을 충분히 이해해 주셨고 대표님의 배려로 2번째 건축설계 계약을 진행했다. 좋은 작품을 함께해 보자고 하셨다.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대표님과의 첫 미팅에 앞서 다시 한번 내가 원하는 것을 정리하는 편지를 써보았다. 사진이나 도면이 아닌 내가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처음부터 다시 해보기로 했다.“바람을 담고 싶다”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제주의 겨울을 좋아한다. 제주 겨울바람은 매섭다. 언제가 겨울 제주의 오름에 올랐는데 차디차고 스산한 바람이 갈대를 스치며 지나는데 그 순간이 너무나 황홀했다. 아무리 사진으로 담으려 해도 바람을 담을 수 없었다. 한밤중에 기름보일러가 꺼져서 기름통을 이고 기름을 사러 다녀도 말이다. 그리고 눈이 수북하게 내린 겨울밤 은은하게 울리던 풍경종소리도 잊을 수 없었다. 또 달빛이 충만하게 밝았던 어느 밤 그냥 집 앞 차길에 벌러덩 눕기도 했다. - 깜깜한 시골이라 딱히 위험하지 않았다 - 물론 술이 취했던 것이 아니라 달빛에 취했다고나 할까. 나의 집은 그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을 담았으면 했다. 그런 집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첫 미팅은 그 편지를 읽어가면서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바로 대표님은 로망의 실현과 소박한 공간 간의 나의 혼란함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셨다.“늙어서는 시골에 사는 게 아니야. 늙을수록 더욱 세상과 소통해야 해. 이 공간은 세컨드하우스로 그냥 ‘이곳은 제주야’처럼 제주의 느낌이 풍성한 공간으로 채우면 어떨까 해”나의 뒤통수를 때리는 말씀이셨다. 사는 곳과 로망을 실현하는 공간이 섞여 있으니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대표님 말씀대로 사는 곳이 아니라 세컨드하우스로 힐링하러 오는 공간이라 정의한다면 많은 것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방과 벽으로 구분된 주택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힐링이라는 요소에 집중하고 프라이빗과 퍼블릭한 공간을 꼭 벽이나 방으로 구분하지 않을 수 있다. 꼭 필요한 요소만 집어넣는다면 이곳은 집이라기보다는 나에게 집중하는 공간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다 보니 대표님이나 내가 신나게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냥 모든 게 유리면 어떨까요. 밖에서는 뭔지 모르는 미지의 공간처럼 보였으면 좋겠어요. 지붕은 우주선 모양은 어떨까요? 계절에 따라 공간이 변하면 좋을 것 같아요.” 상상은 끝이 없었다.대표님은 첫 번째 질문으로 나의 공간-이제 집이란 표현을 안 쓰기로 했다- 이 제주의 자연과 조화로워 튀지 않고 묻혔으면 좋을지 아니면 오히려 강렬하게 대비되면 좋을지 물으셨다. 나는 이미 제주에는 자연과 조화로운 가장 대표적인 ‘포도호텔’ 등 건축물은 많은 것 같고 그러한 건물들은 대부분 돌처럼 무겁고 어둡고 차분하고 때로는 우울한 것 같기도 하다고. 나의 공간은 경쾌했으면 하고 따뜻하고 밝고 오히려 제주의 자연이 도드라질 수 있는 모던한 모양이면 좋겠다고 했다. 이렇게 건축사와 유쾌하고 재미있게 이야기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우리의 이야기가 어떻게 현실화될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초기 미팅은 거의 매주 몇 회씩 진행되면서 하나하나 이미지의 형태로 간결하고 거칠게 구체화시켜 나갔다.“공간이 온전하게 본인에게 집중된다. 모든 걸 해체하여 하나의 공간으로 통합되는데 여기엔 사방이 모두 유리로 되어 있는 거지. 공간이 사방으로 개방되어 있을 순 없는데 ‘담’이란 것이 외부와 내부를 가르는 기호라면 이 ‘담’이란 것을 프라이빗과 퍼블릭함을 구분하는 의미로 해석해 본다면 어떨까”대표님은 네 면이 유리로 된 직육면체에 ‘ㄷ’ 자로 이를 둘러싼 담을 종이에 그리셨다. 제주의 자연에 대비되는 직선의 아름다움. 제주의 자연을 물씬 느낄 수 있는 사방이 온통 뚫린 내부 공간. 그 공간을 둘러쌓아 남쪽으로만 뚫려 있는 담. 실제 지붕은 경사진 지붕이지만 외부에선 두드러지게 직선으로 지붕 외부를 둘러쌓는다. 이를 통해 전반적인 직사각형의 일체감을 추구하고 바닥은 땅으로부터 약간 들려있다. 멀리서 보면 기다란 직사각형 건물이지만 그 내부는 안과 밖, 프라이빗과 퍼블릭으로 구분되어 있다. 매우 단순하면서도 개방적이고 실험적인 공간이 탄생하게 되었다.스케치 디자인된 형태를 모형으로 제작해 보았다."내부 공간과 담이 하나의 지붕으로 연결된다면 내부 공간과 담사이의 새로운 공간이 탄생하고 이는 내부이기도 하고 외부이기도 한 계절에 따라 또는 기분에 따라서 공간이 확장하고 새로움이 탄생할 수 있는 멋진 공간이 될 것 같아"대표님이 스케치한 그 모습이 너무나 멋져 보였다. 처음 토지를 선택할 때 고민 지점이 있었다. 원래 집 지을 땅은 도로가 남쪽 앞으로 지나가는 북쪽 땅을 선택했는데 그것이 향후 재산가치가 더 클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도로변에 주차하기 쉬어 장사나 상점 하기가 더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장사하는 공간이 아니라 매우 개인적인 공간으로 탈바꿈되었다. 최종 선택은 도로가 뒤쪽으로 난 남쪽 땅을 골랐는데 오히려 도로가 뒤쪽으로 나야 프라이버시가 보장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 공간도 북동서 방향으로 삼면을 담으로 가리고 남쪽은 도로나 사람이 다닐 수 없어 뻥 뚫려 있어도 완벽하게 내부를 보호할 수 있었다. 대표님은 하나하나 나의 혼란을 정리해 주셨다. 나의 로망은 층고가 높은 집이었다. “너는 이 공간에서 어떻게 지내고 싶어? 사색하고 책 읽으면서 정적으로 지내고 싶어 아니면 액티비티 하고 활동적으로 지내고 싶어?"나는 당연 정적으로 조용하게 머물고 싶다고 했다. 소장님은 심리적으로 층고가 높으면 사람들이 보다 흥분하면서 뭔가 행동하려는 성향이 있다면서 정적이라면 층고는 낮추고 오히려 와이드 하게 넓게 시야를 가져가는 것이 맞다고. 특히 우리 토지의 뷰는 와이드 한 뷰가 더욱 멋지니 가로로 길게 빼는 것이 더 맞다고 생각한다고. 명확하여 반박할 것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층고를 낮춘 것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층고보다는 더 높게 설계하여 개방감을 완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가장 두려웠던 제주의 매서운 겨울. 사면이 유리 즉 창호라면 난방에 문제가 없을지. 멋있긴 하겠지만 추운 건 싫었다. 요즘 건축 기술의 발달로 단열재의 성능이 엄청나다며 창호도 삼중 유리로 압착된 제품 등 적절한 재료를 사용하면 우려를 줄일 수 있다고. 특히 제주는 영하로 내려가는 날씨가 거의 없으니 난방은 특별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물론 나는 당연히 최고의 제품을 쓴다면 그렇겠지만 삼면을 창호로 배치하는 것이 건축비를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대표님은 그런 부분을 모두 고려해서 정리해 보자고 하셨다. 특히 매서운 제주 겨울의 북풍을 막기 위해 북쪽으론 어떤 창도 없이 벽으로만 구성하여 어떠한 열손실도 없도록 설계가 되었다. 사실 건축비는 현실이었다. 코로나와 전쟁 등을 거치면서 건축비는 기하급수적으로 올랐다. 100% 대출로 건축비를 충당하겠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이게 가능할지 잘 가늠이 안 됐다.건축에 대한 여러 가지 제약도 따라왔다. 우리 땅은 약 300평 정도 됐는데 최소 건축면적은 10% 이상이었다. 즉, 최소 30평 이상을 지어야 했는데 건축비 등 최소한의 투자를 위해 20평대로 생각했는데 고민이 되었다. 허나 이런 부분도 소장님이 해결해 주셨다. 보통 건축에서 건축면적과 연면적은 명확하게 다르다고. 쉽게 건축면적은 바닥이나 지붕 넓이를 말한다면 연면적은 실제 활동하는 내부 공간으로 한정할 수 있다고. 실내 공간은 20평대이지만 전체 건축면적은 40평대 이상으로 설계를 해주셨다. 이는 실내와 담 사이의 공간을 지붕으로 연결하면서 해당 면적만큼 건축면적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처마와 같이 지붕을 1미터 정도 빼면 해당 면적은 연면적에는 포함이 안되지만 건축면적에는 포함된다고 했다. 지붕의 트랜스포머한 이 공간이 건축 허가에서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 공간을 ‘와랑 스튜디오’라고 명명했는데 이를 듣고 현지 분들은 우리 공간을 ‘사진관’이라고 부르기도 하셨다.연초에 시작된 설계 작업은 3월쯤 마칠 수 있을 것으로 보였으나 6월에 다다르고 있었다. 급하게 추진하진 않겠다 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시간을 흘러 보내긴 어려웠다. 특히나 수도 문제는 담당자가 구두로 협조를 약속했는데 혹시나 담당자가 교체되거나 시간이 오래되어 딴소리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다. 나는 대표님께 세부설계는 일단 허가부터 넣고 그 후에 할 수 있냐고 여쭤 보았는데 가능하다고 하셨다. 허가는 제주 건축사무소와 함께 진행했다. 중간에 대표님이 합류하면서 기존 계약했던 제주 사무소랑 계약을 해지하지 않고 설계는 서울에서 진행하고 허가는 제주와 역할 분담을 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현지 사정에 밝은 제주사무소가 허가 업무에 더 효율적이라 판단했다. 특히 토목이나 경계 설계 등에서 현지 조례에 밝아 그쪽 부분은 제주 쪽에서 진행했다. 계약해지로 기 지급한 비용을 포기하기보다는 추가 나머지 비용을 조정하면서 2개의 설계사무소를 적절하게 활용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난관에 봉착하다허가는 사실 이미 두 집이 허가를 득하였기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미 몇 가지 이슈는 과거에 해결되어 또다시 문제를 제기한다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도 문제도 잘 풀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복병은 역시나 튀어나왔다. 허가에 토지에 대한 ‘지상권설정’ 동의서가 필요했는데 처음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와랑마을에서 토지 비용이 부족하여 전체 땅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었다. 제주 토지라 근처의 제2금융권을 통해 대출을 받았는데 이율이 1 금융권보다는 훨씬 높았다. 나는 건축허가를 위해 대출은행에 동의서가 필요하다고 서명을 요청했는데 거절을 당한 것이다. 토지주와 건축주 명의가 다르다는 이유로.나는 농지를 소유할 수 없기에 건축허가를 받으면 바로 토지를 구매할 예정으로 해당 대출은 내가 승계하겠다고 했는데 은행 측은 거듭 안된다는 것이었다. 대출을 상환하거나 토지를 분할해서 명의를 같게 하라는 것이었다. 해당 대출이 내가 아니기도 했으나 토지를 소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리고 임으로 토지를 분할할 수 없는데 두 가지 모두 바로 진행하기 어려워 보였다. 주변 금융권 지인들에게 상담을 했는데 은행 측의 대응은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그 어느 은행도 쉽게 동의서를 내주지 않을 것이라 했다. 만약 동의서를 내주고 내가 토지 구매 않고 바로 건축을 해 지상권을 설정하면 토지의 담보 능력이 현격히 떨어지는데 담당자가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일어나기 힘든 확률이지만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허가는 실시간으로 건축사무소에서 확인해 주었다. 건축사들만 보는 ‘세움터’라는 건축행정 시스템(https://www.eais.go.kr/)에서 현재 어떤 부서에서 언제 승인했는지 코멘트가 무엇인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좋은 세상이다. 문제는 동의서가 없으니 한 달 가까이 더 이상 진행이 안되고 있었다. 우리는 부족한 자료는 추후 제출하기로 하고 일단 허가 신청서를 제출한 상태였다.며칠 고민하다가 해당 대출을 내가 일단 상환하기로 결정했다. 일명 ‘한스론’-유일하게 마을에서 대기업계열 근로소득자로 가장 높은 신용도를 보유하여 생긴 애칭으로 위기 순간엔 한스론의 필요성이 대두되곤 했다-이라고 하는데 해당 대출의 규모는 전체 내 건축비의 25%가량 되었다. 건축비로 사용할 대금이었으나 이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진도가 나가지 못했다. 당장 해당 비용을 상환받기 힘들어 보였으나 와랑마을을 믿고 대신 상환했다. 일단 건축 허가가 나오면 땅을 분할한다. 그동안 땅값이 올랐으니 내 땅이 아닌 나머지 필지에서 다시 대출을 추진하여 나의 한스론을 상환하기로 계획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자 건축허가가 바로 나왔냐고? 아니요. 최종적으로 ‘농지보존부과금’를 납부하면 허가해 주겠다고 했다. 이는 농지 개발을 위해 전용하는 면적만큼 부과금을 국가에 지불해야 하는데 전용할 농지의 면적에 개별공시지가의 30%를 곱하면 된다. 이때 개별공시 지가는 평방미터당 5만 원을 초과할 때에는 상한액 5만 원만 곱한다. 이 또한 대략 알고는 있었는데 향후 건축이 완료된 후 납부하는 줄 알았으나 허가 전에 미리 납부하는 것이었다. 공사비는 한정적이었는데 전체 건축비에서 적지 않은 금액이 미리 빠져나가니 다시 현타가 오기 시작했다.통장은 비워져 가고 있었지만 드디어 건축허가가 바로 나왔다.
건축허가가 났다고 바로 공사를 시작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거의 책 한 권 분량의 협의문서 가이드에 따라 건축사가 착공 신고를 내야 한다. 나름 낼 돈은 다 냈다고 생각했는데 각종 면허세를 또 내야 했고 국민채권이란 것도 구매해야 했다. 전체 비용에 비하면 큰 비용은 아니긴 했다. 이건 온라인으로 납입이 불가하고 해당 면사무소 또는 제주시청에 직접 내야 해서 당일치기 제주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때 카드 납입은 불가하고 현금만 가능했는데 신용카드만 가져가서 무척 당황했었다. 시청 근처에 신용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어이가 없어 낙담을 하고 있다가 편의점 현금기기에서 카카오페이앱을 통해 현금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착공신고는 납입 영수증과 함께 어느 업체랑 공사를 할지를 정하는 등 착공계획을 작성하여 착공신고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이제 가장 중요한 누구와 공사를 하느냐가 남았다.직영공사 VS 종합건설사설계 대표님은 공사 중에 각종 사고나 문제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니 책임감 있고 튼실한 종합건설 면허가 있는 업체에 시공을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예전에 제주에서 공사를 했을 때 단 한 번도 사건사고 없이 만족스럽게 진행했던 현장이 없다고도 했다. 기존 내가 논의 중이었던 시공사는 종합건설사 면허가 없었다. 건축은 크게 직영공사와 종합건설사 발주공사로 나뉠 수 있겠다. 보통 제주 주택은 200제곱미터 이상 공사에서는 종합건설사 공사가 필수지만 그 이하에서는 직영공사– 건축주가 책임을 지고 시공사에게 위탁 -가 보통인 듯싶었다. 와랑마을의 앞선 두 집도 모두 직영공사였지만 큰 사건은 없긴 했다. 건축주가 주도적으로 현장 소장도 계약하고 각 단계별 업체에 연락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고 한다. 나도 당연히 직영공사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대표님은 반대셨다.“직영공사는 리스크가 커. 현장에서 사건사고가 나면 건축주가 책임져야 하고 시공사가 나중에 문제를 일으켜도 스스로 해결해야 해. 반면 종합건설사는 최종 완공된 건축물을 납품받는 형태로 관리비용이 좀 더 들지만 가장 안전하게 공사를 진행할 수 있지. 그리고 우린 제주 현장에 자주 갈 수 없으니 직영은 더욱 어려울 수 있을 것 같아.”그렇다. 종합건설사를 통해 안정적으로 공사를 진행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문제는 추가적인 비용인 것이다. 앞선 제주 시공사 사장님은 30여 평 작은 공사에 종합건설사가 참여하기에는 무리스러울 것 같다고 말씀 주셨다. 각종 보험료 및 관리비 등 추가적인 비용이 더 드는데 비용이 더 드는 것도 문제지만 과연 큰 업체가 작은 건축 공사에 참여할지 모르겠다고 말씀 주셨다. 사장님은 종합건설사 입찰참여가 필수라면 참여가 어려울 것이라 하셨다. 지금까지 많이 도와주셨는데 죄송했다. 나도 굳이 내 예산안에서 종합건설사가 참여한다면 땡큐인 상황이지만 그만큼 공사비 부담은 더 커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합건설사 자격을 가진 업체만으로 경쟁입찰을 통해 우선협상권자를 선정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실제 공사에 쓰일 실시설계 등 보다 세밀한 설계를 준비하고 보다 명확한 공사비 산정을 위해 모든 내외장재 및 각종 소모품 등 크기와 규격을 정하는 스펙북을 작성하기로 했다. 스펙북까지 계약서에 첨부됨으로 협의 없이 시공사 임으로 재료를 교체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스펙북 작성에는 아내가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제주에 공간을 갖고 싶은 로망이 있을 뿐 그 공간이 목조이든 콘크리트 건 큰 상관없었다. 외벽이 흰색이든 검은색이든 어떠하리. 내부가 우드이든 회색이든 다 좋았다. 물론 전체적인 디자인에 이은 느낌이 스튜디오 개념이라 목재의 따뜻함보다는 갤러리 같은 안정적이고 깔끔한 느낌이길 바랐다. 아내도 어느 정도는 동의했는데 두 사람의 취향이 한데 섞여 난해해 지기보다는 아내에게 특히 내부 인테리어는 일임하도록 했다. 일관성을 유지하기도 하지만 아내는 지난 세월 각종 재료의 장단점 및 특징 등을 스터디하고 있었고 뚜렷한 취향 그리고 무엇보다 안목이 있었다. 인스타나 핀터레스트 등 다양한 이미지를 찾아왔었고 전등 하나하나, 손잡이 하나하나, 수전 하나하나 나름 개성적이고 특색 있는 제품들을 찾아 리스트업 하고 있었다. 이를 그대로 스펙북에 반영했다. 일단은 로망을 실현해 보기로 하고 향후 공사비 규모를 보면서 하나씩 수준을 낮춰보기로 했다.경쟁 입찰에 누가 참여할까최종 입찰에 참여한 업체는 두 곳이었다. 한 업체는 제주를 기반으로 한 건설사로 H대 건축대학원 출신으로 검도 네트워크에서 추천을 받았다. 다른 업체는 서울 업체인데 제주에서 단독주택 등 현재 지속적으로 시공을 하고 있는 전국적 업체라고 했다. 이 또한 검도 네트워크를 통해 소개받았다. 다른 업체도 몇몇 곳 추천받았는데 검증이 쉽지 않아 일단 두 업체로 제안했다. 대표님은 제대로 입찰을 해야 한다며 RFP(제안요청서)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각종 공사증명서 등 어마어마한 자료들을 요청하겠다고 하셨다. 요즘 건설경기가 좋진 않지만 작은 주택공사에 종합건설사가 경쟁적으로 들어오려고 하진 않았던 것 같았다. 입찰은 실시도면과 스펙북을 참고하여 세부적인 견적서까지 제출하는 것으로 입찰공고가 나가고 약 2주간 후 우선협상업체를 선정하기로 했다. 제안요청이 자세했기에 명확하게 견적을 낼 수 있었고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었다. 업체가 어떤 견적을 줄지는 정말 예측하기 힘들었다. 6월 건축허가 후 10월쯤에는 시공사를 선정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시간은 11월에 이르고 있었다. 입찰에 참여한 두 업체에서 최종 견적을 보내왔다. 건축사무소 쪽에서 견적서를 바로 보내주셨다. 두 업체의 견적서 파일을 여는 순간 난 숨이 턱 막혔다. 한 업체는 내 예상 금액의 2배, 다른 업체는 그 업체보다 1억 원 정도가 적은 금액. 두 곳 모두 내 예상을 엄청나게 넘겨서 보내왔다. 우울해졌다.“이렇게 무리하면서까지 해야 하는 걸까?”대표님은 바로 연락이 와서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다. 첫 번째 견적이고 충분히 검토해서 비용을 줄 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전반적으로 재료비나 인건비 부분에서는 양사가 큰 차이는 없었다. 해당 1억 차이는 간접비에서 대부분 차이가 났다. 어쩌면 세부 견적에서 얼마나 도면을 보고 고민을 했는지의 차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1억이 적은 업체는 매우 자세하고 우리가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도 역으로 제안을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간접비는 사실 네고가 가능한 부분이기에 처음에 높게 지르고 나중에 낮춰주려는 전략으로 보였다. 그 사실이 더 열받기까지 했다. 우리는 고민이 더 많아 보이고 금액도 1억이 더 적은 업체를 최종적으로 선정했다. 나는 그럼에도 최소 1억 이상을 네고를 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이상 네고가 가능하다면 견적 자체가 엉망이었던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나는 망연자실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또 멈춰야 하는가도 생각했던 것 같다. 곧 대표님쪽에서 말씀을 주셨다.“전체적인 견적은 특별하게 과하게 책정한 비용은 없는 것 같아. 1차적으로 재료 부분을 조정해 보고 그래도 안되면 면적을 줄이는 등 설계를 바꿔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전체 콘셉트를 유지하는 선에서 최대한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 마지막 네고는 간접비에서 한 번 조정을 요청해 봐야 할 듯해”해당 견적에서 돌담 쌓기와 에어컨을 빼니 3천만 원 정도가 줄어들었다. 재료비와 인건비에서 간접비까지 빠지니 줄어드는 폭이 컸다. 이 두 가지는 내가 직접 계약을 맺으면 비용을 더 줄 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시스템 창호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창호는 시공사가 최고의 브랜드를 제안했기에 모두가 바꾸지 말자고 했다. 그다음으로 외부 마감을 변경했다. 비용의 한계로 나름 ‘STO’라는 독일제 외부 마감을 선택했는데 이를 일반적인 ‘스타코’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최소 1천만 원 이상이 줄어들었다. STO는 서울에서 전문 시공인력이 내려와서 작업해야 하는데 전체 콘셉트에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외부 바닥 데크 등을 이태리제 타일로 선정했는데 검토결과 시멘트 플러싱으로 효과를 내도 오히려 더 깔끔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니 얼추 1억 가까이가 낮아지고 있었다. 점점 처음 생각했던 재료가 많이 바뀌고 있었지만 무리 없는 선에서 정리 중이었고 그럼에도 설계자체를 바꿀 공간 규모까지는 손대고 싶지 않았다. 나름 최적의 공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얼추 1억을 낮추었지만 재료를 다운그레이드한 것이 50%, 나머지 가구 등 직접 계약할 것이 50%였기에 시공사 계약은 1억이 낮아졌지만 내가 추가로 확보해야 할 비용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여기저기 이미 생각했던 공사비를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추가 비용은 어찌할지 난감했다. 다시 나의 방황이 시작됐다. 방황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다음번 시공사 미팅 전까지 나의 결정이 필요한 상황이었다.시공사와의 최종 담판10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경기도 벽제에 있는 추모공원에 모셨다. 그때 받은 보험금 등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을 합쳐서 제주땅 구입 자금을 마련했었다. 그러기에 아버지도 일정 지분을 갖고 있다. 가끔 아버지를 보러 가는데 이날도 그랬다. 그리고 물어봤던 것 같다. 내가 행복해도 될는지. 내가 행복할 수 있을지. 물론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는데 가슴속에 따뜻해짐을 느꼈다. 자문자답일지도 모르겠지만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라는 것. 그 고통이란 것이 조만간 행복감으로 바뀌기를 바라기로 했다. 그리고 난 아내에게 건축비의 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추가적인 비용을 요청했다. 특히 이 비용은 건축비라기보다는 건축 후에 소요되는 가구, 조경 등 시공사에 지급하지 않는 별도 비용이었다. 대출을 싫어했던 아내는 최종적으로 해당 금액을 자신이 부담하기로 약속했다. 나머지 금액은 미래를 위해 남겨두었던 미국 배당주 관련 ETF 등을 팔고 향후 6개월간의 월급 등 빠듯하게 모으면 될 수 있지 않을까 했다.시공사와의 최종 담판에서 큰 가격 네고 없이 진행 합의를 하였다. 어떤 식으로든 시공사 대표와의 연결고리를 찾으려 했는데 마침 대표님의 고향과 나의 중고등학교 졸업 지역이 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이도 나와 비슷하시어 한 다리 건너면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대표님은 견적을 아주 타이트하게 내어 네고의 폭이 크지 않았고 하셨지만 그럼에도 약간은 조정해 주셨다. 대표님도 제주에 세컨드하우스를 갖고 계시고 제주를 좋아하시는 분이었기에 정말 좋은 작품을 한 번 만들기로 하고 계약을 체결하기로 했다. 시공 계약서는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기본 표준계약서를 체결하기로 했다. 1주일 후에 계약 날인하기로 하고 나는 열심히 계약서를 읽어 보았다. 표준계약서라 검증되기도 했고 부족한 부분은 특약을 넣기로 했다. 폭풍 검색으로 보다 엄격한 계약서도 존재하는 것을 알았지만 실제 현장에서 매일매일 현장을 체크하는 것이 힘든 상황이라면 이 정도 계약서로 합의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설계 대표님도 아무리 계약서를 잘 쓰더라도 막무가내 시공사를 만나면 이길 수는 없다고 중요한 것은 실력 있는 시공사를 선정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계약 후에는 시공사와 건축주의 갑을 관계가 바뀐다는 얘기가 있는데 나는 잘할 수 있을까.
드디어 첫 삽을 뜨다11월 말쯤 계약을 하자마자 착공서류준비에 들어갔다. 건물이 들어설 땅에 지질역할조사도 하여 첨부하고 각종 안전기술계약서 등 공사를 시작하기 위한 다양한 서류들이 요구되었다. 우린 건물 크기가 크지 않기에 착공 서류 제출 후 이틀 남짓해서 승인이 떨어졌다. 공사는 12월 첫 주부터 시작이 됐다. 시공사는 공사기간을 6개월로 잡았는데 작은 공간치고는 길게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더 걸렸다. 여름의 땡볕과 장마를 피하기 위해서도 12월에 시작하는 것이 필요했다. 시공사는 첫 공사의 역사적 현장에 건축주와 설계자 등이 함께 했으면 한다고 했다. 공사의 시작은 ‘규준틀’이라고 건물이 앉힐 지점을 정확하게 체크하는 일부터 시작했는데 이를 함께 하자고 했다. 당연히 나도 참석하고 싶었으나 아내와 내가 동시에 제주에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케어가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아내에게 참석을 권유했다. 나야 나중에 또가면 되겠지만 아내에게 그 역사적 현장을 맡기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꼼꼼한 아내가 주로 가게 되었다. 난 현장에서 사진을 찍는 일 이외에는 별다른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매일매일 공사현장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네이버 ‘밴드’에 온라인 공간을 마련했다. 현장소장은 거의 매일 사진으로 진행사항을 올려주셨다. 현장소장은 제주에서 다양한 예술(?)적 건축을 수행하신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라고. 좋은 현장소장을 만나는 일도 일종의 행운이 아닐까. 우리나 건축사들도 모두 현장에 자주 갈 수 없기에 이런 자료는 매우 유용했다. 특히, 하루하루의 진행사항을 파악할 수 있어 공부도 되고 흥미롭기까지 했다. 궁금한 사항은 바로 채팅창이나 댓글로 질문들을 올렸다. 다양한 기능을 통해 히스토리도 관리할 수 있었다. 진행사항을 보면서 비로소 건축에 눈이 뜨이기도 했다. 토목공사가 진행됐고 건물의 기초가 되는 바닥 콘크리트 기초 타설이 진행됐다. 곧이어 벽체 등 외단열재가 함께 설치되고 이를 철골로 보강하고 있었다. 공사 시작 한 달도 되지 않아 건물의 뼈대가 완성되고 있었다. 설계 대표님은 기초가 가장 중요한데 이는 공사의 70%가 시행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현장은 한 달에 한 번꼴로 내려가 현장을 살펴보고 각종 궁금한 사항이나 이후 진행사항 그리고 세세한 결정사항 등을 결정하곤 했다. 자세하고 전문적인 사항은 설계 대표님쪽에서 바로바로 전화로 협의 중이라고 했다. 혹자는 현장에 CCTV를 설치하는 등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굳이 필요성을 못 느꼈다. 옆집인 2호 집에서도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해 달라고도 했지만 시공사와의 소통엔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벽체와 지붕까지 철근콘크리트를 타설 하니 1월 말이 되었다. 총 6개월 정도의 공사기간에서 3분의 1일 지나고 있었다. 가장 추운 2월에 공사를 진행하는 것이 걸리긴 했는데 모두들 입을 모아 제주는 괜찮다고 했다. 보통 콘크리트 타설시 영하 5도 이하로 내려가면 문제가 될 수 있으나 제주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특히 2월에 제주에 눈이 많이 내렸는데 건축은 눈보다는 기온이 더 크게 작용하고 양생기간도 2주 이상 충분히 거치고 1층 건물이라 큰 하중은 없다고 했다. 대표님쪽에서 건물을 최대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쉽게 현장에서 작업할 수 있게끔 설계를 하셨기에 현장 소장님도 결과물이 잘 나올 것이라 하셨다. 이제 날씨가 풀리면서 창호를 골조에 얹히면 공간을 아름답게 다듬는 미장 공사가 시작된다고. 하나하나가 다 신기하고 진행하면서 주변분들의 자세한 설명으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결정장애는 없었다공사는 잘 진행되고 있었으나 한 가지 걸리는 지점은 조경과 가구설치였다. 자금이 부족한 관계로 건물 건축만 추진하고 있지 건물 주변과 실제 건물 안쪽에 들어갈 가구들은 고민만 하고 있을 뿐 아무런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나 나의 고민을 상담해 주는 건 검도 커뮤니티 커피타임이다. 열심히 운동하고 H대 캠퍼스의 우리의 아지트에서 건축과 교수님은 주옥같은 말씀을 주셨다.“일반적으로 건폐율이 40%라면 일반 설계사는 건물만 설계를 하곤 하지. 하지만 건축이란 나머지 60% 외부에 대해서도 디자인을 해야 해. 땅이란 건축물만이 아니라 이를 둘러싼 땅까지 모두 포함하는 거지. 그래서 너무 급하게 결정하지 말고 고민하고 고민해서 실행해. 집을 짓고 나면 다 돈이야. 돈 들어갈 곳이 한 두 곳이 아니야. 섣불리 결정하지 말고 즐긴다는 생각으로 고민해 봐.”언제나 힘이 되는 말씀이다. 사실 시공사 측에서 공사하는 김에 수영장을 만들면 어떨지 물어왔다. 나중에 완공 후 또다시 공사하는 것보다 함께 진행하면 비용을 50% 줄일 수 있다는 솔깃한 얘기를 하셨다. 나의 로망인 수영장을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만들 수 있다니. 물론 여과기 등 수영장을 제대로 갖춘다면 비용이 많이 들지만 땅을 파고 방수처리 후 타일 정도 까는 건 어렵지 않다고 했다. 이때 전선이나 수도 등도 함께 빼는 작업도 포함해서 말이다.문득 이런 식으로 하면 비용이 계속 증가하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마침 교수님의 말씀도 있고 해서 조경은 이번 공사에서 제외하도록 했다. 실제 살아보고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추구할 것인지를 충분히 고려해서 추진한다면 설사 비용이 더 든다고 해도 감당할 수 있지 않을지. 아직 우선순위도 뚜렷이 모르기에 조급하게 결정하지 않기로 했다. 또한 가구만 해도 이번 시공 계약에서는 기본 가구 이외에는 제외를 했다. 아일랜드 테이블 등 키친 가구, 테이블이나 책꽂이 등 서재 가구들이 그 대상이다. 아직 현장의 공간 감각이 없어서 어느 정도의 크기로 어느 위치에 놓을지 생각이 매일매일 바뀌었다. 물론 설계 도면으로 대략적인 크기와 위치는 잡아 놓았다. 왜냐하면 전기 콘센트 위치나 전등 위치에 전기 공사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콘센트를 최대한 많이 분포하도록 설계가 되었다.철골 기초 타설이 예정보다 빨리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공사는 약 4주간 멈춰있었다. 1월 말 시스템 창호 발주를 넣었는데 업체에서 4주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본 공사는 직영공사는 아니기에 일정이 늦춰진다고 나에게 금전적 타격은 거의 없었다. 아마도 시공사 쪽에서 당황하긴 했던 것 같다. 창호로 벽을 막아야 내부 미장 공사에 들어가나 우선 창호 없이 할 수 있는 공사를 하기로 했지만 매우 제한적이었다. 일단 지붕 공사에 들어갔는데 단순하게 보였던 지붕 공사도 제주의 날씨와 태풍 등을 견디기 위한 구조, 물 빠짐, 디자인 요소 등을 고려하니 적지 않은 손길이 들어갔다. 마지막 작업은 아무래도 작업의 효율성을 위해서 시스템 창호가 들어와 금속팀이 함께 작업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는지 창호가 들어와서야 마칠 수 있었다. 창호가 붙여지고 내부가 외부와 단절이 되자 공사는 속도를 내었다. 갑자기 진행 사항이 빨라지며 비로소 건물의 내부 형태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설계 대표님은 현장에 비교적 만족감을 보이셨다. 제주는 항상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으나 이번엔 별다른 문제점이 보이지 않다고. 현장의 문제는 설계도를 따르지 않고 자신이 해왔던 방식으로 손쉽게 하려다 발생하는 것이 대부분. 현장소장은 항상 설계도를 갖고 다니시며 잘 모르거나 협의가 있을 시 대표님께 바로바로 연락을 했다고 한다. 물론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았다. 가끔 방문하는 현장에서 현장소장도 미쳐 빠뜨리거나 명확하지 않았던 지점이 발견되어 바로 수정보완에 들어가거나 매일 올려주는 사진을 통해서도 미비점이 발견되어 서울과 제주 사이 전화기가 불이 나도록 논의가 진행되기도 했다. 가끔 현장에서 다른 방식을 제안하거나 실제 진행의 어려움을 토로해 왔다고 했다. 허나 대표님은 언제나 원칙은 설계도대로였다. 시공사는 대표님과 협의가 안될 시에 나에게 직접 연락을 주었다. 그때 나는 언제나 결정은 설계사님이 하십니다고 답변했다. 타협은 없었다.
공사가 거의 막바지에 이를수록 현장과의 소통이 많아졌다. 세부 디테일한 마감공사가 많아짐에 따라 협의사항도 많았다. 현장에 자주 갈 수 없고 현장에 있더라도 그 짧은 순간에 모든 것을 체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도면을 세밀하게 그린다고 하더라도 한계는 있어 보였다. 설계 쪽에선 당연하게 생각하여 생략하거나 건축주와는 충분히 상의했던 요소들이 현장에서 100% 알기란 쉬워 보이지 않았다. 현장에서 알아서 더 잘해 주신 부분도 많았으나 정의되지 않았던 아니 정의됐더라도 물리적 한계로 진행이 어려운 부분도 있었는데 그 물리적 한계라는 것도 사실 상대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과연 누가 리스크를 부담할지의 문제였다. 현장에선 이런 문제로 자주 건축주인 나에게 연락이 오기도 했는데 나는 기술적 지식이 부족하여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가 대부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색깔을 정하거나 높이를 정하는 정도였고 이외의 것은 모두 설계를 담당하신 대표님께 결정을 넘겼다. 대표님은 언제나 원칙론자였기에 현장은 어떤 식으로든 설계도를 기반으로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어 보였다. 약간의 긴장감도 느낄 수 있었다. 시공사 쪽에선 마지막 계약일정에 맞추려고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공사가 조금 늦어져도 상관은 없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현장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공사가 시작되고 정확하게 6개월 만에 사용승인 준비에 들어갔다. 기간이 넉넉하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미흡한 부분이 나타났다. 시공 쪽에서는 우선 사용승인 신청을 하고 부족한 부분은 채워나가겠다고 했다. 예들 들면 주차장 라인을 칠하는 부분이나 도로명주소 신청한 후 팻말을 부착하는 것 같은 자잘한 이슈들이 남아있었는데 우선 신청하기로 했다. 미리 신청을 했기에 서류상 미비점은 담당공무원들이 바로바로 연락을 주셨다. 그리고 각종 사진 이미지도 추가 요청해 주셨다. 그리고 마침내 담당공무원이 현장에 나왔고 승인주체인 시공사 측에서 현장 대응을 했는데 다행히 별문제 없이 돌아갔다고 한다.공사가 끝났다고 모든 것이 종료되는 건 아니었다. 사용승인이 나와야 비로소 건물에 들어와 생활할 수 있었다. 이후 건물대장을 발급받고 취득세도 내고 실제 등기소에 등기도 해야 한다. 등기도 셀프로 했는데 필요한 서류만 준비해 가니 실제 걸리는 시간은 채 10분도 안 됐던 것 같다. 주변 정리도 필수다. 우리 공사로 이웃이 불편했을 것이다. 공사를 마칠 때쯤 옆집과 저녁을 함께 했는데 실제로 불편했던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고. 정말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민원 사항이 적잖이 발생했을 것 같았다. 크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나 도로 파손 등 몇 가지 피해에 대해 원상복구에 해당하는 보상도 필요했다.와랑 스튜디오의 전경몇 가지 미비점도 발생했다. 수도요금을 체크해 보니 생각보다 많은 요금이 나왔다. 우리가 잠깐 사용한 것이라고 보기엔 너무 컸다. 어딘가 누수가 발생했다고 생각되어 여기저기 측량을 해보니 보일러실 밑에서 물이 새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며칠 사용하지도 않았던 가스비가 많이 나와서 살펴보니 보일러에도 이상이 발생한 것이었다. 다행히 최종 잔금을 처리하기 전이라 이런 부분을 모두 최종 잔금 전에 수리 및 처리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장마가 시작됐고 물 빠짐 등 사용상의 문제점 등을 바로 확인할 수 있어 어쩌면 다행이라 생각되었다.최종 공사비는 계약서상에서 변동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좀 더 낮아지기도 했다. 실제 공사를 하면서 줄어든 비용이나 합의하에 설치하지 못 한 비품들은 전체 금액에서 제외해 주었다. 물론 계약 범위에 포함이 안 됐던 부분- 이를테면 성토를 추가로 진행 - 등은 합리적 비용으로 추가가 되기도 했지만 전체 공사비에선 미미했다. 역시 설계와 계약서에 입각하여 진행하여 추가적인 이슈가 없었던 것이 작용한 듯싶다. 시공사 측에서도 남는 것이 하나 없다고 울상이었다.바람이 머무는 공간건물에 입소한 첫날을 잊지 못한다. 아직은 완벽하게 갖춰지지 않은 공간에서 야외 조명을 켜고 밝은 달빛을 바라본 것 같다.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밖에는 각종 벌레들이 진을 치고 있어 창호를 활짝 열 수는 없었다. 생각만큼은 낭만적이지 않았다. 10년간의 여정이 마무리된 것에 대한 허탈함이었을까. 그래도 남쪽으로 길게 난 창호를 통해 바라본 와이드 한 뷰는 내가 꿈꾸던 그 상상 이상이었다. 그냥 멍하니 바람을 맞으며 밖에 앉아만 있어도 좋았다. 바람이 머무는 공간. 이제 제주에 나의 공간이 생긴 것이다.저녁 와일드한 앞마당 풍경.다음 날 아침엔 일찍 눈이 떠졌다. 아무래도 새집 냄새가 나 길게 잠을 잘 수 없었다. 6월인데도 시골의 아침은 으스스했다. 제주의 습한 기온과도 관련이 있겠다. 낮에 해가 뜨면서 기온은 서울보다 낮은 것 같은데 빛의 강렬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낮 땡볕에 나와 있으면 바로 쓰러질 것 같은 강렬함이다. 낮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제주는 여행이나 쉼의 대상이었지만 이제 제주는 나에게 관리와 노동이란 새로운 미션을 부여한 듯하다. 실제 지내면서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나 완료되지 못한 것을 해결해야 했다. 비어있는 나머지 땅은 어찌해야 할지, 실제로 살지 않는 공간에 대한 관리 범위, 하나하나 공간 비품을 어디까지 비치해야 할지 등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 일본의 비에이/후라노에서 본 또 남프랑스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본 라벤더를 심을지, 고즈넉한 청보리를 심을지. 나의 손자들을 위한 오두막집을 지을지 멋진 연못을 지을지 상상하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만해진다. 나의 꿈의 끝은 어디일까.
누군가는 제주가 너무 멀어 무엇인가를 투자하기 무모하다고 말을 하기도 한다. 제주까지는 항공으로 1시간 거리지만 공항까지 가는 시간, 보딩하고 짐검사하고 이런저런 기다리는 시간, 그리고 렌터카를 픽업하는 시간까지 모두 합친다면 반나절이다. 그래서 제주를 한 번 가기 위해서는 커다란 스트레스를 이겨내야 할 정도인데 웃기는 건 제주에 내리는 순간 나는 새로운 세상에 공간 이동을 한 것처럼 그러한 스트레스는 온 데 간 데 사라지고 오로지 제주의 분위기에 흠뻑 취하게 된다. "그래 오길 잘했어!"분단국가로서 남북의 차이, 서울의 강남과 강북 등 우리나라는 주로 남북으로 지역감정이나 차별을 주로 이야기 하나 제주는 동서 지역차이가 있다고 한다. 제주에서 흔히 들었던 것이 ‘동쪽 여자하고는 결혼도 말아라’란 얘기였다. 동쪽은 바람이 세고 땅이 척박하여 예전부터 서쪽이 훨씬 부유했다고 한다. 4.3 사건의 아픈 역사의 현장도 동쪽에 많았다. 얼마 전 제주 건축 현장을 방문 후 비행기 시간이 남아 동쪽으로 이동한 적이 있다. 제주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은 최소 1시간 이상 걸리는 긴 여행이다. 제주시와 서귀포시가 한라산으로 나뉘어 있듯이 동서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예전에 살던 동쪽은 동쪽 나름의 운치가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제주의 서쪽과 동쪽의 차이는 서쪽은 평평하고 농지가 많은 곳, 동쪽은 산세가 험한 숲이 우거져 있다. 깊은 곳에 들어가면 높은 침엽수가 마치 북유럽 감성이 나기까지 했다.동쪽 중산간을 지나다가 코너에 쑥 들여진 곳에 위치한 한 카페를 발견했다. 사실 이곳은 내가 동쪽에 살 던 동네에 위치해 있었다. 만원이 넘던 발효커피(한 잔 가격이 아니라 전통차처럼 계속 우려먹는다)를 내려주시던 주인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본인은 4년 전 내려와 천여평이 넘는 이 공간을 하나하나 가꾸고 있다고. 옆집의 도예공방엔 서울에서 은퇴하시고 내려오신 교수님께서 20년째 운영하고 계시다고 했다. 그녀의 얼굴은 평온하고 행복하게 보였다.<제주 구석구석 숨겨진 장소를 찾는 재미가 있다>제주의 현실물론 제주는 현재 어려운 현실에 직면해 있다. 한때 젊은이들이 이주해 새로운 삶을 꿈꾸며 제주를 일구었던 친구들이 하나둘 떠나고 있다고. 중국 등 제주의 부동산과 관광을 부흥시켰던 외국인들이 줄어들고 제주의 높은 물가들에 의해 관광객들도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제주에서 자리 잡고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에 산업시설이 부족한 제주에서는 어느 곳보다 도전적인 상황이다.아직 나의 제주 프로젝트가 나의 보금자리가 될지, 비즈니스 공간이 될지 모르겠다. 제주에 머물면 머물수록 자꾸 욕심이 생긴다. 동쪽의 숲 속에 자리 잡은 우리 땅은 아직도 팔리지 않고 있다. 그곳은 그곳 나름의 매력과 감성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나의 이번 소중한 경험이 미래에 어떤 기회를 가져다 줄지. 그러한 상상만으로 마음은 충만해진다. 제주의 서쪽이든 동쪽이든 각각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일단 주어진 우리의 와랑 스튜디오를 잘 가꾸고 즐겨야겠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새로운 길을 가져다주었으니.
건축 시 건축비를 조달하거나 허가를 얻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이와 함께 각종 세금 관련 이슈도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나는 건축에 앞서 법인을 설립하기로 했다. 단기적으론 세금 절세 이유가 컸고 장기적으론 아이들에게 가장 현명한 자산의 증여 및 상속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즉, 부동산 등 현물을 상속하는 것보다 부동산을 소유한 법인의 내 지분을 상속하면 과세대상이 줄어들게 될 것이고 이때 나는 아이들에게 경영이나 투자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주고 싶었다. (상속에 대한 비과세 금액이 커지는 법률이 시행된다면 큰 차이가 없을 수도 있겠네요)우리는 1 가구 2 주택이다. 결혼 즘에 나와 와이프가 각각 집이 있었는데. 1 가구 2 주택이 얼마나 세금에 취약한지 잘 몰랐다. 2024년쯤 들어서는 양도소득세 중과세가 유예 중이긴 하나 보유한 아파트 한 채를 팔려면 억 소리 나는 양도세를 내야 할 수 있다. 또한 종합부동산세를 비롯하여 세금은 무지막지했다. 여기에 우리가 제주에 주택을 짓는다면 1 가구 3 주택에 해당된다. 투기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부동산에 큰 관심이 없었다고 할까. 수익에 대해 세금을 내는 것에 대해 큰 불만은 없다. 난 내가 좋아하는 지역에 임대가 아닌 내 공간을 마련하고 싶었을 뿐이다. 2년마다 이사를 했고 또 제주에서는 매년 이사를 하기도 했다. 이사는 내게 스트레스였다. 물론 원한다고 다 가질 수 없는 건 아는데. 그럼에도 내가 감당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1 가구 3 주택은 부담이었다. 특히 회사 스톡옵션 구매를 위해 아파트를 담보로 생활안정자금 대출을 받았는데 대출의 제한 사항 중 추가로 가구수를 늘리면 안 되는 조항이 있었다. 나는 은행에 문의해서 아파트가 아닌 제주의 농가주택-이 아닐 수도 있으나 질의해 봤다-도 가구수에 포함되어 대출을 상환해야 하는지 물었다. 돌아온 답변은 당연히 가구수에 포함되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고 했다.결국 해결책은 담보를 갚고 가구수를 늘리고 다시 대출을 추진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이게 일정이 딱딱 맞아야 하고 일정 기간 큰 자금을 조달해야 했다. 가구수를 늘리지 않으려면 신규 주택 등기를 늦추는 방식도 있었는데 찾아보니 착공 후 60일 이내 등기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고 한다. 불이익이 어느 정도인지 찾아봤는데 지자체마다 조금씩 다른 것 같았다.결국 신규로 가구수에 포함되지 않는 방법은 주택이 아닌 근린생활시설로 짓거나 법인을 설립하여 법인명으로 건축을 하는 방식이 있다고 판단했다. 나는 이제 나의 자산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진 않았다. 어쩌면 현재 보유한 자산을 유지하거나 최대한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는데 이는 추가 수익을 추구하기보다는 내는 세금을 합법적으로 줄 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금을 공부하면서 여러 가지 절세나 미처 몰랐던 사실을 알 수 있었는데 문제는 이걸 다 기억하기도 어렵고 책에 나와있는 내용들은 최신 업데이트되지 못한 한계도 있었다.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회계사나 세무사의 문턱은 왠지 높아 보였다. 주변에 수소문하여 몇몇 분들을 소개받았는데 최근 어머니 아는 분의 아들이 세무사 시험을 통과하여 최근에 개업하신 분이 있다고 들었다. 어머니 친구분은 나도 알고 있어 가볍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만나기로 했다.사전 미팅에 앞서 내가 고민하는 지점을 정리하여 미리 보냈다. 세무나 회계에 있어 자신의 전문분야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특히 이 분은 세무사 시험 전에 이미 기업체 회계팀에서 실무경험을 많이 쌓으셨기에 법인 세무에 관해서는 베테랑이셨다. 이 분은 법인 설립을 추천해 주셨고 가장 빠르게 설립하는 것이 가장 큰 이득이라고 말씀 주셨다.우리는 가족 법인으로 네 식구가 지분을 나누고 이를 기반으로 건축을 하면 건축한 후 이를 법인에 증여하거나 매각하는 것보다 법인의 가치가 더욱 향상될 것이라고. 매월 법인 케어를 받고 분기별 부가세 신고 그리고 1년에 한 번 법인세 신고 업무를 하는 것이 버거워 보이긴 했으나 법인을 설립함으로써 받을 수 있는 부가세 환급은 매력적이었다. 즉, 건축설계 및 건축시행에 발생하는 부가세 부담을 환급받을 수 있다고 하니 이것만으로도 법인을 운영하는 이점은 될 것 같았다. 물론 법인 운영에 대한 장단점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우선 아이들에게 예전에 증여-미성년자의 경우 10년간 최대 2000만 원까지 비과세-했던 펀드를 해지를 했다. 얼추 50% 수익이 불어나 있어서 따로 별다른 증여 없이 그 금액을 그대로 지분화 했다. 내 지분은 최소한으로 해서 나머지 가족들 지분만으로 90% 이상을 만들었다. 물론 아이들은 자신들의 사전동의 없이 펀드해지에 대해 반발했으나 성인이 될 때 꼭 지분의 가치를 10배까지 만들어 보자고 했고 아이들 각자에게 법인 직책을 부여했다. 겸직이 가능했던 아내는 대표이사, 딸은 부사장, 자유로운 삶이 좋다는 아들은 인턴사원으로 나는 프리랜서.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 딸이 회사 로고도 만들고 명함도 디자인중이다. 나는 장기적으로 공간에 대한 관심으로 사업을 추진할 확률이 높다고 보고 이를 통해 자산을 증식시킨다면 자녀들에게 나의 자산을 실물이 아닌 법인을 통해 증여 및 상속함으로써 쉽게 말하면 부동산이나 현금이 아닌 법인을 통한 경영이나 운영의 역량을 남겨주고 싶었다.법인으로 건축 시 단점도 당연하게 있다. 일단 법인이 부동산 특히 주택을 보유함으로써 내게 되는 세금체계가 결코 낮지 않다. 법인의 1 가구 주택 취득세는 12%는 이는 3 주택 이상의 개인 최대 세율과 맞먹는데 다행히 신규 주택 취득은 원시취득세로 3% 이하로 매우 저렴하다. 이와 함께 법인의 주택 종합부동산세도 매년 3%에 달하는 등 법인이 주택을 보유하는 것은 매우 가혹해 보인다. 일반적인 근린생활시설 같은 건물이나 빌딩은 주택 종합부동산세가 없이 일반적인 재산세만 부과되어 법인에게는 안성맞춤이다.여기서 법인이면서 주택을 소유하며 세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물론 있다. 그것은 바로 국민임대주택사업자로 국민임대주택에 해당하는 주택을 소유하게 되면 임대사업을 하는 사업체로 인정되어 각종 세금 혜택을 받는다. 특히 종합부동산세 부과대상에서 제외되기까지 하니 이를 면밀 검토했는데 기본적으로 해당 주택의 가격이 비수도권의 경우 3억 이하 및 면적이 100제곱미터 이하라면 시도해 볼 만하다. 해당 주택이 국민임대주택 및 임대사업자가 될 수 있을지는 해당 지자체에 자세히 문의하자.
일하기 싫은 세 분야나는 20여 년이 넘게 일반회사에 근무하면서 ‘일하기 싫은 3가지 분야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그들은 S전자, (과거) 지상파 방송사, 공무원들로 물론 모두가 그렇진 않다는 점을 밝혀둔다. 일하기 싫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날로 먹으려고 하는데. 용역에 대한 적절한 대가나 비용 지불 없이 그저 조직의 명성이나 권한으로 ‘나 여기 직원이야’하면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사례를 들어보고 싶지만 이곳의 주제와는 벗어나기에. 초년병 시절에 공공기관 영업을 한 적이 있었다. 전산 담당 공무원과 주로 업무를 추진하는데 당시에는 뒷돈이나 특별한 특혜를 요구한 적이 많았다.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이런 분야의 사람들과 접촉하는 일은 일단 스트레스였다.이번 제주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많은 관공서와 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특히 공무원에 대한 내가 갖고 있는 선입견이 정말 달라졌다. 또한 건축의 진행과정 및 법인의 설립 등에 있어서 다양한 서류 처리 및 허가 업무 등이 필요했는데 가끔은 우리나라 IT 인프라 및 적용에 놀라곤 했다.K-정부의 위상첫째로 법인 설립 부분이었다. 우리 법인의 이름은 딸아이의 별명을 따서 지었다. 법인 설립은 법무사를 통해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셀프 설립을 도와주는 온라인 서비스가 존재했다. 물론 완전 셀프로 온라인에서 진행할 수 있는 중기청 사이트가 존재하여 실제 수행해 봤는데 이곳은 스타트업에 특화되어 가족 법인 설립은 불가-미성년자 주주명부 등록불가-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등기를 도와주는 업체인 ‘마이빌드’를 소개받아 함께 진행했는데 나름 만족스러웠다. 여기서도 큰 벽을 만났는데 나름 부동산을 기반으로 운영될 법인인데 신청 당시 소유한 부동산이 없을뿐더러 현재는 농지이기 때문이었다. 건축물이 없는 곳은 도로명 주소가 없었다. 모든 회사 관련 서류를 온라인으로 진행하기 위해선 도로명 주소가 필수였다. 그리고 사업자등록증은 사무실 주소 및 임대계약서가 필수였다. 나는 도로명 주소가 없다는 점을 증명해야 했고 왜 임대계약서가 없는지를 앞으로 이 법인이 어떤 사업을 어떤 시간 순으로 영위할 것인지 다양한 자료를 통해 오프라인으로 설득해야 했다. IT 강국인 우리나라 그리고 이제는 수준 높아진 공무원님들의 수준에 별다른 사건사고 없이 법인등기가 잘 이루어졌다. 잊을 수 없었던 일은 비농업인이 농지를 소유하기 위해서 ‘농지취득자격증명원’을 발급받아야 등기를 설정할 수 있는데 면사무소까지 가지 않고 온라인에서 발급받으려면 도로명 주소를 입력해야 하는데 여기서도 도로명 주소에 막혔다. 면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담당 공무원과 통화했는데 매우 친절했고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셨다. 정부 24 신청란에 근처 도로명 주소를 적으면 면사무소 담당자가 우리 지번으로 직접 변경해 주기로 했고 번거롭지만 다시 신청을 해달라고 했다. 도로명 주소 때문에 정부 24 콜센터 직원분과 우리 면사무소 담당자가 서로 직접 통화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주셨던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법인 등기 변동 사항 – 이사진 변경, 주소 이전 - 등 모든 것은 정부 인터넷등기소에서 셀프로 가능했는데 번거로운 뿐 어렵지는 않았다. 단지 그놈의 액티브 X(윈도 보조프로그램) 문제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십 년 이상 맥 OS기반으로 노트북으로만 업무를 수행하다가 이를 위해서 윈도 PC를 잠깐 사용했는데 정부 사이트를 다루긴 매우 불편하고 때로는 불가능하였다. 그럼에도 국세청, 법원, 정부 24 등 많은 곳에서 모바일로 다양한 서류 및 증빙을 실시간으로 출력할 수 있었다. 꼭 오프라인 현장에서 발급받는 서류는 '인감증명서'뿐으로 파악되는데 이것도 조만간 온라인화될 수 있지 않을까.이러한 공공기관의 IT인프라와 전산화 덕분에 제주에 직접 가지 않고도 처리할 수 있어 제주 프로젝트 추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세컨드하우스를 에어비앤비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비어있는 시기에 수익화가 가능하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최근 에어비앤비도 정책을 바꾸어 2025년 10월까지 정식 허가를 받은 공간만이 호스트 등록이 가능하다고 선포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등록된 물건의 50% 정도는 불법 숙박업소라고 한다. 우리 와랑 스튜디오는 현재 시점에서 정식 허가를 받을 수 없다. 정식 숙박업-소방시설 등 각종 안전사항들을 준비해야 해서 쉽지 않다고-이 아니라면 도시의 경우 외국인민박업 허가를 받아야 하고 시골의 경우엔 농어촌민박업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제주의 허가 조건은 3가지다.주소지 6개월 이상 및 주거 단독 소유,주택 연면적 230평방미터 이하,임대 시 3년 거주 및 2년 이상 임차 계획을 제출해야 한다.아직 와랑 스튜디오는 위의 조건을 만족하지 못한다. 세컨드하우스의 특성상 아직 주민등록을 이전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주변에서 힘들게 집을 지었는데 타인이 사용하면 집이 쉽게 망가지는데 굳이 숙박을 하느냐의 의견과 빈집을 놀리는 것은 안타깝다는 의견이 많았다.막상 숙박을 하려고 하니 이 공간이 내 공간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뭔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타인과 셰어 해서 쓰고 있는 손님 같은 느낌도 들었다. 꼭 필요한 공간을 공유하고 싶은 분들은 누구일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주변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이곳을 누가 찾을까 생각해 보기로 했다. 급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최근 제주의 에어비앤비 시장은 크게 양극화되어 있다고 한다.수영장이 있는 단독풀빌라의 경우 1박에 40만 원 이상이 넘어도 잘 운영되고 5만 원 이하로 잠만 자는 것이 목적인 숙소도 인기라고 한다. 지은 지 오래됐거나 시설이 낙후된 업소들이 타격을 받고 있다고. 더군다나 제주 숙박업소들은 최근 크게 증가했다는 조사자료도 있다.에어비앤비를 통해 충분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영상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와랑 스튜디오도 신축이고 디자인적으로도 충분히 고민했기에 자신감은 있으나 문제는 운영적인 부분도 고려해야 한다. 즉, 퇴실 후 청소 및 숙박 중 고객의 응대 부분이다. 바로 옆에 있지 않은데 이를 빠르게 대응하기 어려울 것이다.어쩌면 이런 부분이 많은 세컨드하우스를 가진 분들의 고민이지 않을까 한다. 물론 이의 고민을 해결하는 운영을 대행해 주는 회사도 존재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높아진 인건비 등으로 제삼자에 의해 운영이 대행되는 것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비즈니스도 마케팅이나 브랜딩 그리고 감동적인 운영 등 모든 것이 충분히 고려되어 추진하는 것이 실패와 혼란을 최소화하는 길일 것이다. 최근 굳이 숙박이 아니라도 멋진 공간을 단기임대하는 사업도 활성화되고 있다. 특히 와랑 스튜디오는 ‘예술하고 싶은 공간’을 모토로 말 그대로 스튜디오로서 역할 및 각종 모임의 공간으로서 더 기대하고 있다.이를 위해 와랑마을의 다양한 능력을 가진 구성원 및 인맥을 통해 다양한 비상시적 체험 프로그램을 추진해 보는 건 어떨까 고민 중이다. 와랑 스튜디오의 건축비 확보의 어려움은 이런 즐거운 상상으로 상쇄되기도 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사람들에게 매력을 주는 공간이란 어떤 지점인지 계속 고민하게 된다.
누군가 제주에 세컨드하우스가 있다면 취미 등 뭔가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필요할 것이라 했다.매번 좋은 경치만 보기엔 심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도 무척 잘 지내는 편이라 걱정은 하지 않지만 한편으론 너무나 하고 싶은 일이 많다. 특히나 4차 산업인 IT업계에 종사하다 보니 가장 인간적인 1차 산업인 농업 그리고 먹거리에 관심이 많다.아직 와랑마을에서는 팔리지 않은 공용땅이 존재하는데 마침 농지들이라 바로 농사를 지을 수도 있다. 단지, 내가 직접 노동을 하는 일은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리 건장한 체격을 갖고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최근 경제 이슈가 된 ‘레버리지’ 효과에 주목하고 있다. 내가 직접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상품의 가치를 높이는 브랜딩이나 마케팅 분야에서 협업을 할 수 있지 않을지. 이런저런 생각에 미치다 보니 농부의 삶 그리고 귀농귀촌에 대한 정부 지원 등이 궁금해졌다.정부는 농부 또는 농업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리고 있었다.농지 1000평방미터 이상 농작물을 재배하는 경우,1년 중 90일 이상을 농업에 종사하는 경우,농산물을 1년에 120만 원 이상 판매하는 경우,1년 중 120일 이상 축산업에 종사하는 경우( 4대 보험 다른 사업장에 가입),농업회사법인이나 영농조합법인에서 가공. 유통. 판매에 1년 이상 된 사람.그렇다면 농업인이 되면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일까.농업인 혜택은 무엇이 있을까농업인이 되면 낮은 이율로 시설투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이와 함께 세금 부분이라 판단된다. 자료를 찾아본 바에 의하면 농사를 기업적으로 짓지 않는다면 농사를 통해 내는 세금은 일반 근로소득세에 비하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거듭 얘기하지만 개인적으로 농사를 지어 큰 이익을 얻지 못하는 산업구조에서 세금까지 일반적인 소득세를 낸다면 버틸 수 있는 농업인은 없을 것이다. 이에 정부는 예전부터 농업인에 대한 각종 세금 혜택을 준 것으로 보인다. 바람직해 보였다.또한 농업인에 이은 농촌주택이란 개념도 조건에 맞는다면 각종 세금 혜택을 가지고 있다. 우리 와랑 스튜디오도 이런 농업주택에 해당될 수 있다면 향후 양도소득세 감면 등 많은 혜택을 가지고 있는데 이게 이런 식으로 내가 활용해도 될지 등에 약간 혼란스럽긴 했다. 결국 당장 이것을 추진하기보다는 정말 내가 농업에 진심이라고 판단된다면 그때 다시 고민해 보기로 했다.농업의 미래는 자급자족일까이와 함께 요즘 이슈인 ‘스마트팜’ 분야도 관심이 있다. 농업인이 되고 농업법인을 설립하여 유치된 자금으로 스마트팜 사업을 시범적으로 도입해 본다면 어떨까도 생각했다. 자급자족의 세계. 우리의 미래에 있어 식량의 자급자족, 건강한 먹거리는 최첨단시대도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이슈일 것이다.AI가 인간의 노동력과 전문성을 대체한다고 하더라도 '먹는다'라는 기본적인 산업 자체가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농업 식량이란 분야를 연구하고 도전하는 일이란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특히, 와랑 스튜디오의 남겨진 땅에 이런 실험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생각만 해도 즐겁다.이런 이야기를 건축가 대표님께 한 적이 있는데. 대표님은 내가 자꾸 제주에 투자하려고 한다며 제주 프로젝트는 와랑 스튜디오로 끝내고 서울의 핫한 플레이스에 더욱 재미있는 일을 꾸며보자고 하신다. 스마트팜이란 것을 굳이 제주가 아니라 서울에서 ‘시티팜’의 형태로 발전시켜 보는 것은 어떨지. 서울 가장 핫한 공간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다면. 미래 자급자족의 이슈는 지방이 아니라 메가 도시가 해결해야 할 문제로 누구나 자신이 먹을 야채와 채소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일도 공동체적으로 필요할 것이다.이쯤 되니 건축과 교수님은 도시의 아파트 단지 화단에 굳이 예쁜 나무를 심는 것이 아니라 간단한 농사를 짓고 자기 단지의 쓰레기는 스스로 재활용하는 일은 미래에 필요한 사항일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집 한 채 짓는데 담론은 매우 광대하며 우리가 해결해야 할 일은 매우 많음에 놀라기도 한다.은퇴 이후가 심심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기도 한다.
이 이야기를 쓴 주요 이유는 우리의 건설 현장이나 문화가 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분명히 있다. 비전문가의 눈으로 건설산업의 이해관계가 없는 내가 바라본 현장은 '매우 폐쇄적이고 표준화되어 있지 않고 공급 중심적 모습'이었다. 나 같은 비전문가들은 발붙일 자리는 없었다. 특히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굳이 건축을 수익창출이 목적이 아니라면 직접 하고 싶어 할 하등의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것이 산업 종사자들은 본인들이 생존 전략이라고 생각하는 건지는 모르겠다.어쩌면 큰 지식도 없는데 건축을 하는 내가 투덜대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전문가들은 일하는데 불편한 점은 없을 수도 있겠다. 집 짓는데 그 정도의 노력도 없이 쉽게 할려니 어려운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돈만 있다면 전문가들이 다 알아서 해주니 뭐가 더 필요하냐고 할 수도 있겠다. 집 한 채 지어보고 뭘 알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모두 맞는 말이다. 건축분야에 통합된 정보제공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다른 분야라고 잘되어 있지는 않겠다. 내가 궁금한 사항은 설계 및 현장에 직접 물어보거나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찾아야 했는데 특히나 인터넷의 자료는 적용방식 등에 대한 상이한 내용도 있었던 것 같고 동영상 사이트에는 셀프 집짓기 내용이 대부분이다 보니 목조주택 내용이 훨씬 많았던 것 같다. 쓰고 보니 큰 문제가 없어 보이긴 하는데. 시장이나 고객이 확대하고 성장하기 위해 스스로 능동적으로 지식을 축적해야만 하는 이러한 방식이 계속되는 한 업계의 결연한 의지가 없다면 확장되기 어렵다는 생각이 계속 들긴 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을 믿어야만 하고 이것이 맞는 것인지 언제나 의심해야만 하는 현실이 나랑은 잘 맞지 않았다.제주 프로젝트는 감리 없이 진행되었다. 일단 60평 이하의 건물은 필수가 아니었고 나에겐 제주도 감리비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의 대표님이 인간적으로 현장과 소통하며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혼자서 이렇게 무리 없이 공사를 끝내지는 못 했을 것이다. 현장이 제주이고 감리도 없다 보니 부실공사 등 뭔가 문제가 없을지 초반엔 걱정이 앞섰다. 최근에는 부실공사의 위험은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정부의 준공검사 기준이 상당히 세밀하고 엄격하여 건설자재를 빼먹거나 기준 미달의 제품을 몰래 사용하는 것이 어렵고 오히려 그런 것을 조작하는 것이 비용이 더 들 수도 있다고. 제품의 증빙 그리고 다양한 사진과 동영상을 준공 및 사용승인 과정에 제출해야 되기 때문에 건물의 내부 구조 차원에서의 문제는 어느 때보다 안심해도 된다고. 기술의 차이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다. 문제는 디테일인데 이것이 건축의 차이를 만드는 걸로 보였다. 즉, 현장에 어떤 사람들이 투입되느냐에 따라 결과물의 수준이 달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것은 시공사 계약시점에서 전혀 예측할 수 없고 예측이 가능하다고 해도 실제 현장에서는 변수가 많아 보였다. 건축가 대표님은 우리나라의 건축문화의 특성에 있다고 하셨다. 우리 건물 건축의 대부분 철근콘크리트 재료를 많이 사용하고 이는 현장에서 물을 섞어 시멘트를 배합하고 말리는 과정인 ‘습식’ 방식의 건축 문화라 했다. 이는 매우 고비용인데 인력이 많이 들어가고 전문성을 요하기 때문이라고. 해외에서도 자금 여유가 많은 부자들이 선호하는 방식이라고. ‘건식’은 대부분 큰 공장에서 자재들을 제작하여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인데 이런 방식이라면 건설 기간도 축소되고 자재들이 표준화되어 있어 디테일의 차이가 크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우리나라는 축복받은(?) 4계절이 뚜렷한 기후라 난방이나 단열 그리고 창호의 역할이 매우 크기 때문에 바로 건식방식을 적용하긴엔 한계가 있을 수 있다고. 한 겨울과 한 여름의 팽창과 수축을 버텨야 하는 재료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사례가 없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방식이 옳다고 하긴엔 무리다. 어떤 방식이 맞다고 속단할 수 없지만 재료가 발달하여 건식방식의 건설이 보다 대중화된다면 비용적인 부분이나 접근성 부분에서 좀 더 발전이 있지 않을까.우리의 주거환경, 도시발전, 생활패턴과 환경 그리고 국내외 시공방식의 차이 등 건축 문화 그리고 새롭게 도전해 볼 만한 과제 등 좀 더 다양한 주제에 대해 궁금했지만 그런 자료는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건축계의 알쓸신잡은 없을까?내 주변의 건축과 교수님이나 소장님들에게 많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지만 수많은 동영상에는 셀프집짓기 건축주들의 성공담이나 예쁜 집들을 소개해주는 내용만 넘쳐났다. 간혹 건축가들이 모여서 여러 이슈들에 대해 논의하는 채널도 있긴 했지만 나의 호기심을 채워주진 못 했다. 건축 쪽의 셀럽이라는 홍익대 건축과 모 교수님의 내용을 좋아했던 것 같다. 매우 폭넓은 지식과 호기심을 채워주셨지만 뭔가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았다. 나는 교수님이나 대표님께 우리도 채널을 만들어보자고 가볍게 말씀드렸는데 상당히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셨다. 아마도 업계 내부 사람들이나 문화를 비판해야만 하는 부분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도 아쉽게 느껴졌다. 글로벌한 세계적 건축가는 해외 그리고 가까운 일본에도 많았지만 우리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거장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나 젊고 기대되는 건축가가 대중적으로 더 많이 나와야 보다 건축이 친밀해질 것 같은데 건축가들이 조금은 매체나 미디어를 어려워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러한 지식을 사전에 내가 좀 더 접할 수 있었다면 건축을 하기 전에 보다 근본적이고 다양한 고민을 더욱 담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건축은 재활용이란 것은 없고 언제나 새롭고 창조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이 매우 즐거우면서도 고달픈 현실이다 AI의 시대. 건축은 표준화되고 자동화되는 세태에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는 분야일까. 아니면 AI가 설계하고 바로 3D프린트와 로봇이 집을 짓는 미래가 펼쳐질 영역일지.'집짓기'라는 공간 프로젝트는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이 아니라 언제나 아쉬워 또 한 번 도전하고 싶은 그 무엇이었다. 다시 도전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