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시간의 알찬 소비  ·  당신 주변의 변화를 관찰합니다

Special Collection

맛의 문명사

Curated by네모네AIM Team
4 Stories Included

본 시리즈는 음식에 담긴 역사와 문화, 인류의 문명사, 그리고 식재료의 본질적인 가치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푸드 인문학 컨텐츠입니다. 특정 식재료나 요리가 인류의 역사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발전해 왔는지를 심도 있게 다루고 최상의 맛을 결정짓는 기준과 식재료의 차이를 전문적으로 분석합니다. 결국 인류의 음식과 맛은 우리가 살아온 환경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임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nemoneaim

# 맛의문명사# 푸드인문학# 최고의재료를찾아서# 맛대맛# 추위는어떻게풍요가되었나# 국경의식탁
분홍색 마가린을 먹어야 했던 이유?: 150년 버터 vs 마가린 색채 전쟁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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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 마가린을 먹어야 했던 이유?: 150년 버터 vs 마가린 색채 전쟁의 비밀

1. 나폴레옹 3세의 기묘한 현상 공모1867년, 프랑스 파리 근교 뱅센 숲에 위치한 페장드리 황실 농장에서는 인류의 식탁 지형도를 뒤흔들 기묘한 실험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절박한 과제 하나를 내걸었습니다. 급격한 인구 증가와 전쟁 준비로 인해 귀해진 버터를 대신할, '값싸고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지방'을 개발하는 이에게 막대한 상금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이 특명을 받은 화학자 이폴리트 메주무리에는 소의 지방(우지)을 녹이고 우유와 섞어 유화시키는 연구 끝에, 1869년 마가린의 시초가 된 '올레오마가린'을 탄생시킵니다. 이는 단순한 신제품의 등장이 아니었습니다. 수천 년간 식탁의 권력을 쥐어온 버터와 신흥 기술의 산물인 마가린 사이, '150년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2. 마가린은 맛이 아닌 '산업화의 요구'가 낳은 발명품이다마가린이 태어난 본질적인 이유는 미식적 탐구가 아닌,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구조적 변화에 있었습니다. 19세기 중반,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을 먹일 식량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특히 냉장 기술이 미비했던 시절, 신선도가 생명인 버터는 유통 과정에서 쉽게 상했고 가격은 천정부지로 솟았습니다. 국가 입장에서는 군대와 빈민층에게 공급할 '전략적 에너지원'이 절실했습니다.메주무리에가 선택한 원료인 '우지'는 우유보다 훨씬 저렴하고 대량 확보가 용이했습니다. 그는 맛의 정점이 아니라, 산업화 시대의 결핍을 메우기 위한 공학적 해결책으로서 이 지방 덩어리를 설계했습니다."맛을 위한 발명이 아니었습니다. 싸고, 오래가고,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는 지방. 산업화 시대가 요구한 식량 기술이었습니다."3. '분홍색 마가린'을 강요했던 법적 탄압의 역사마가린이 시장을 잠식해오자, 위기감을 느낀 낙농업계는 국가 권력을 동원한 강력한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미국의 낙농업계는 마가린이 버터처럼 보이지 않도록 '시각적 사보타주'를 감행했습니다. 1890년대 말, 버몬트와 뉴햄프셔 등 일부 주에서는 마가린에 식욕을 떨어뜨리는 분홍색 물감을 들이도록 강제하는 **'분홍색 법(Pink Law)'**을 시행했습니다.이것은 단순한 규제를 넘어선 경제 전쟁이었습니다. 1902년 제정된 법령에 따르면, 노란색을 넣은 마가린에는 1파운드당 10센트의 세금을 매긴 반면, 색이 없는 마가린에는 단 4분의 1센트만을 부과했습니다. 40배에 달하는 세금 차별을 통해 마가린의 시장 진입을 원천 봉쇄하려 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음식을 단순히 '맛'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색깔'이라는 시각적 믿음을 통해 소비한다는 심리를 이용한 고도의 정치적 장치였습니다.4. 법망을 피한 소비자들의 '노란 캡슐' DIY정부의 가혹한 규제에도 마가린의 생명력은 끈질겼습니다. 마가린 업체들은 법망을 교묘히 피하면서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기발한 해법을 내놓았습니다.법을 준수하는 껍데기(The Law-Abiding Shell): 유통 단계에서는 법규를 지키기 위해 아무런 색도 넣지 않은 하얀 마가린 상태로 판매합니다.가정 내의 반란(The Domestic Rebellion): 제품 안에 노란색 색소가 담긴 작은 캡슐을 동봉합니다. 소비자가 집에서 직접 캡슐을 터뜨려 섞음으로써 '노란 마가린'을 완성하게 한 것입니다.법은 '노란 마가린의 판매'를 금지했을 뿐, 소비자가 제 주방에서 직접 물들이는 행위까지는 막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노란 캡슐' 에피소드는 20세기 초 미국 가정의 흔한 풍경이 되었고, 낙농업의 성지라 불리는 위스콘신주에서 이 규제가 최종적으로 풀린 것은 놀랍게도 1967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5. 기술적 진보가 가져온 뜻밖의 재앙, 트랜스지방20세기에 들어서며 마가린은 소지방 대신 식물성 기름을 원료로 사용하며 과학적 진보를 꾀합니다. 액체 상태인 식물성 기름에 수소를 첨가해 고체로 만드는 '수소화 기술'이 도입된 것입니다.화학적으로 보면, 식물성 기름의 지방산은 이중결합(Double Bonds) 구조 때문에 분자가 굽어 있어 액체 상태를 유지합니다. 여기에 수소를 가해 이중결합을 없애면 분자가 직선 형태로 펴지며 촘촘하게 쌓여 고체가 됩니다. 문제는 이 과정이 불완전하게 일어나는 **'부분경화유(Partially Hydrogenated Oils, PHO)'**에서 발생했습니다. 자연계에는 드문 변종 구조인 **'트랜스지방'**이 생성된 것입니다.심혈관 질환의 주범으로 지목된 트랜스지방의 유해성이 밝혀지면서, 한때 건강한 대안으로 칭송받던 마가린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결국 2015년, 미국 FDA는 부분경화유를 식품에서 퇴출한다는 최종 결정을 내리기에 이릅니다.6. 버터의 노란색도 사실 '천연'이 아닐 수 있다마가린 전쟁의 가장 역설적인 지점은 '진짜'의 상징이었던 버터의 노란색에 숨어 있습니다. 버터의 색은 원래 소가 먹는 풀 속의 베타카로틴 성분에 좌우됩니다. 여름 목초를 먹으면 진한 노란색이 되지만, 겨울 건초를 먹으면 색이 옅어지는 것이 자연의 섭리입니다.그러나 일관된 '노란 환상'을 원하는 소비자의 기대를 맞추기 위해, 낙농업계는 19세기부터 **'아나토(Annatto) 색소'**를 사용해 버터의 색을 보정해왔습니다. 마가린이 색소를 쓰는 것을 "가짜의 기만"이라며 법으로 탄압하는 동시에, 정작 자신들은 '영원한 여름의 빛깔'을 유지하기 위해 색소를 첨가해온 셈입니다. 우리가 믿어온 '천연 버터'의 이미지는 사실 철저히 계산된 마케팅과 가공의 산물이었습니다.7. 결론: 자연과 가공의 경계에서 던지는 질문150년 전 메주무리에의 실험에서 시작된 이 전쟁은 우리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 진짜인가?"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그 안에 구체적으로 무엇이 들어 있는가?"라는 실질적인 과학의 시각으로 식탁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필요에 의해 발명되고, 경쟁에 의해 색깔이 입혀졌으며, 기술에 의해 성분이 재정의된 지방의 역사. 현대의 마가린은 트랜스지방을 지워내며 재설계되었고, 버터는 여전히 높은 포화지방이라는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순수한 자연산'의 이미지는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요? 그 답은 이제 화려한 마케팅 문구가 아닌, 제품 뒷면의 성분표 라벨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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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탈환이라는 환상, 그 이면에 숨겨진 밀밭의 전쟁: 1124년 십자군 보급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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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탈환이라는 환상, 그 이면에 숨겨진 밀밭의 전쟁: 1124년 십자군 보급의 경제학

1. 1124년 알레포, 성벽 아래의 진짜 공포1124년 10월, 시리아 북부 알레포 성벽 밖의 풍경을 복기해 봅시다. 지평선 너머로 해가 지고 1만 5천 명의 병사와 수천 마리의 말이 머무는 진영에는 무거운 정적이 감돕니다. 하지만 이 정예병들을 떨게 하는 것은 성벽 안의 적군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오늘 저녁에 먹을 빵'**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생존적인 문제입니다.유럽에서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해온 이들에게는 현대적인 보급망도, 냉동고도 없었습니다. 전쟁은 단순히 신념과 무력의 충돌을 넘어, 인간과 동물의 몸이 요구하는 칼로리와 수분을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생물학적 투쟁이었습니다. 십자군의 가장 결정적인 무기는 기사의 칼이 아니라, 적의 숨통을 조이는 '곡물 창고'와 그 안의 밀알들이었습니다.2. 사람보다 무서운 입: 기사보다 까다로운 말(馬)의 식단중세 군대라는 시스템을 유지하는 '연료'는 병사가 아닌 말에게서 가장 많이 소모되었습니다. 십자군 군대는 고성능이지만 유지비가 막대한 '생물학적 기계'들의 집합체였기 때문입니다.말 한 마리의 일일 연료량: 보리 약 2.22.7kg, 건초 약 4.56.8kg.공간의 한계: 말 스무 마리는 단 하루 만에 중간 품질의 목초지 1에이커(약 1,200평)를 완전히 고갈시킵니다.1만 5천 명의 병력이 단 2~3주를 버티기 위해 필요한 식량은 (물과 술, 사료를 제외하고도) 무려 288톤에 달했습니다. 당시의 항해 기술과 물류 속도로는 유럽에서 이 엄청난 양을 정기적으로 조달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군대의 기동력은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 '풀과 곡물의 유한함'이라는 물리적 한계에 종속되었습니다. 그들이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던 진짜 이유는 적을 쫓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을 굶기지 않기 위한 처절한 '물류적 이동'**이었습니다.3. 약탈보다 효율적인 협상: 적의 곡물을 공유하는 법초기 십자군의 '약탈'은 지속 불가능한 모델이었습니다. 마을을 불태우면 내일의 수확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십자군은 '약탈자'에서 **'정교한 자원 추출 시스템의 관리자'**로 진화하며 현지 이슬람 세력과 기묘한 협상을 시작합니다.그들은 칼 대신 계약서를 들었습니다. 1109년 트리폴리는 다마스쿠스와 협정하여 베카 계곡(Beqaa Valley) 농작물의 1/3을 확보했고, 예루살렘 왕국은 요르단 및 야르무크 계곡(Yarmouk Valley) 등 생산성이 높은 지역을 장악하며 그 지분을 절반(1/2)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이 '지분 공유 방식'을 통해 십자군의 보급 체계에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작물이 편입되었습니다.보급 리스트: 밀, 보리, 올리브, 면화, 아마, 아몬드, 피스타치오, 참깨, 양파, 마늘, 고수 등이러한 식량 확보가 얼마나 절박했는지는 1142년 예루살렘 왕 풀크가 비잔티움 황제에게 보낸 서한에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왕국은 영토가 매우 좁아서, 이렇게 큰 군대를 먹일 식량을 내어줄 수 없습니다.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이런 군대를 받아들이면 기근의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4. 성(Castle)은 요새이자 물류센터였다우리는 흔히 성벽을 방어용 시설로만 이해하지만, 물류 전문가의 시각에서 **십자군의 성은 비옥한 농경지를 감시하고 시장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경제적 통제소'**였습니다.고고학자 헤더 크롤리의 연구는 이를 뒷받침합니다. 몽레알 성이나 크락 데 슈발리에 내부에서 발견된 대형 화덕(타분)과 방앗간 흔적은, 성이 군사 기지를 넘어 곡물을 빵으로 전환하고 배분하는 중세판 물류센터였음을 보여줍니다. 즉, 성을 세운다는 것은 단순히 돌벽을 쌓는 행위가 아니라, 그 지역의 칼로리 흐름을 물리적으로 장악하는 자원 거점을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5. 성벽이 무너지면 빵값이 움직인다: 전쟁의 나비효과군사적 패배는 전장의 기록으로 끝나지 않고, 즉각적인 경제적 재난으로 전이되었습니다. 1164년, 안티오키아의 핵심 보급 통로였던 하림 요새의 함락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요새 안에는 7천 명의 인원이 갇혀 있었고, 이 거점이 무너지자 안티오키아의 식량 공급망은 즉시 마비되었습니다. 전술적 패배의 **속도(Velocity)**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습니다. 요새가 함락된 직후 안티오키아 시장에서는 밀값이 폭등했고, 곧이어 공급 자체가 끊겼습니다. **"전쟁의 결과가 식탁에 도착했다"**는 말은 중세의 시장 경제가 전쟁과 얼마나 밀접하게 동기화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잔혹한 증거입니다.6. 국경보다 먼저 움직인 밀알, 그리고 이름 없는 주인공들십자군 전쟁을 '성지를 둘러싼 종교적 결전'으로만 보는 것은 단편적인 시각입니다. 실상은 '레반트 지역의 농업 시스템과 식량 흐름을 누가 통제할 것인가'를 두고 벌인 거대한 물류 전쟁이었습니다. 당시의 '성지'는 신성한 장소이기 이전에, 군대를 유지하고 도시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최고의 '식량 안보 지대(Food Security Zone)'**였습니다.이 전쟁의 진정한 주인공은 화려한 기사가 아니라, 매일 밭을 갈고 빵을 구워 공급망을 지탱한 이름 없는 농민과 상인들이었습니다. 국경은 칼끝에서 갈렸을지 모르지만, 그 국경을 유지한 힘은 대지를 타고 흐르는 밀알의 움직임에서 나왔습니다.그날 저녁, 성벽 아래의 병사는 과연 무엇을 먹었을까요? 그가 씹고 있는 빵 한 조각에는 복잡한 협정의 결과와 요새의 운명, 그리고 생존을 향한 처절한 물류의 역사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다음 편 예고: 밀밭 대신 초원을, 농사 대신 가축을 선택한 사람들 — 몽골군의 육식과 유제품 보급 전략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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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듯 일본 아닌 식탁: 오키나와가 밥 위에 타코를 올린 600년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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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듯 일본 아닌 식탁: 오키나와가 밥 위에 타코를 올린 600년의 사정

1. 킨초의 밤거리, 경계를 지우는 식탁의 재구성오키나와 본섬 중부, 미군 기지 캠프 한센의 정문이 마주 보고 있는 킨초(金武町)의 밤거리는 국가라는 경계가 희미해지는 기묘한 공간입니다. 영어와 일본어 간판이 무질서하게 뒤섞인 풍경 위로 습한 아열대의 공기와 기름진 향신료의 냄새가 엉겨 붙습니다. 이곳의 상징은 단연 '타코라이스'입니다. 멕시코의 영혼이 담긴 타코가 미국을 거쳐 이 섬에 닿았고, 어느덧 토르티야 대신 흰 쌀밥을 안식처로 삼았습니다.하지만 이곳에서 불과 한 시간 거리인 나하(那覇)의 골목으로 들어서면, 수백 년 전부터 이어진 돼지 요리인 '라후테'와 '테비치'가 식탁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현대적인 타코라이스와 고풍스러운 돼지 요리의 공존. 우리는 이 지점에서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인류학적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일본이라는 국가의 틀 안에서, 왜 이 섬은 밥 위에 타코를 올리게 되었는가?" 그 답은 오키나와를 '일본의 남쪽 끝'이 아닌, 거대한 '바다의 길목'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선명해집니다.2. 더위를 이기는 지혜, 곰팡이의 색깔을 바꾸다오키나와의 식문화를 결정짓는 첫 번째 변수는 잔인할 정도로 일관된 더위와 습기입니다. 아열대 기후에서 발효는 축복인 동시에 재앙입니다. 술을 빚기 위해 쌀을 물에 담그면 효모보다 부패균이 먼저 증식하기 때문입니다. 일본 본토가 추운 겨울을 이용해 부패를 피했다면, 겨울이 없는 오키나와는 전혀 다른 생존 전략을 택했습니다. 바로 '흑국균(검은누룩곰팡이)'입니다.본토의 청주가 황국균을 쓰는 것과 대조적으로, 오키나와의 전통 증류주인 아와모리는 흑국균을 사용합니다. 흑국균은 발효 과정에서 방대한 양의 구연산을 쏟아내는데, 이 구연산이 밑술을 강한 산성으로 만들어 부패균의 침입을 원천 봉쇄합니다."동유럽이 유산균의 젖산으로 긴 겨울을 버텼다면, 오키나와는 흑국균의 구연산으로 아열대의 여름을 정복했다."이처럼 척박한 환경을 돌파한 것은 기술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5세기 태국(당시 샴)에서 건너온 길쭉한 쌀과 증류 기술은 오키나와의 흑국균을 만나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자적인 술 문화를 탄생시켰습니다. 외부의 문물을 받아들여 현지의 환경에 최적화하는 오키나와식 '지적 변용'의 첫 번째 사례입니다.3. 돼지를 '울음소리와 발굽' 빼고 다 먹는 국가적 물류 작전오키나와 식탁의 중심에는 돼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섬에서 돼지는 단순한 가축을 넘어 류큐 왕국의 명운을 건 '외교 물자'였습니다. 중국 황제가 보내는 책봉사절단은 그 규모가 400~500명에 달했고, 한 번 머물면 6개월에서 8개월 동안 섬의 자원을 소비했습니다. 이들을 접대하기 위해 매일 20마리 이상의 돼지가 필요했습니다. 이는 작은 섬의 생태계가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물류 작전이었습니다.17세기 초 도입된 고구마는 이 위기를 돌파하는 핵심 동력이었습니다. 태풍에도 땅속에서 버티는 고구마를 인간이 먹고, 그 부산물을 돼지가 먹으면서 섬 전체의 양돈 체계가 확립되었습니다. 자원이 귀했던 만큼, 오키나와 사람들은 돼지의 모든 부위를 식재료로 전환하는 치밀한 계산법을 발전시켰습니다.족발(테비치)이나 귀(미미가)처럼 질긴 부위를 물과 함께 장시간 삶는 방식은 단순한 조리가 아니라 '에너지 효율의 극대화 전략'이었습니다. 시간을 들여 콜라겐을 부드러운 젤라틴으로 변화시킴으로써, 버려질 수 있는 모든 부위를 고단백 영양원으로 재탄생시킨 것입니다."돼지는 울음소리와 발굽을 빼고 다 먹는다"이 오래된 격언은 아껴 먹겠다는 정서적 표현이 아니라, 척박한 섬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류학적 지혜의 산물입니다.4. 550마리의 돼지가 바다를 건넌 기적: 식량 체계의 재시동수백 년간 견고했던 오키나와의 식탁은 1945년 지상전의 참화로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1938년 14만 마리에 달하던 돼지는 전쟁 직후 10분의 1 이하로 급감하며 섬의 식량 안보를 위협했습니다. 이때 기적을 만든 것은 하와이로 떠났던 이민자들, '우치난추(오키나와 사람)'였습니다.1948년 8월 말, 하와이 구제회가 모금한 돈으로 구입한 550마리의 돼지가 미국 오리건주 항구에서 배에 실렸습니다. 그 여정은 사투였습니다. 바다에는 전쟁의 상흔인 기뢰가 떠다녔고, 거친 태풍을 뚫고 5,000km를 항해해야 했습니다. 28일간의 사투 끝에 9월 말 오키나와에 도착한 이 돼지들은 불과 4년 만에 10만 마리로 불어났습니다. 이 550마리는 단순히 단백질의 공급원이 아니었습니다. 분뇨로 밭을 살리고 다시 사람을 먹이는, 끊어졌던 오키나와 식량 체계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한 재시동이었습니다.5. 섞어서 새로운 그릇을 만드는 '찬푸루'의 실용주의전후 미군정 시기는 오키나와의 식탁에 '통조림 고기'와 '쇠고기'라는 새로운 재료를 던졌습니다. 냉장 시설이 전무했던 시절, 상온 보관이 가능한 런천미트는 오키나와의 주방으로 빠르게 스며들었습니다. 하지만 오키나와 사람들은 이를 미국식으로 굽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여주, 두부와 함께 볶아 '스팸 찬푸루'를 만들고, 밥 위에 얹어 '포크 타마고 오니기리'를 발명했습니다.이러한 '섞임(찬푸루)'의 미학은 1984년 타코라이스의 탄생으로 정점을 찍습니다. 킨초의 가게 '파라 센리'의 기보 마쓰조는 주머니가 가벼운 미군들을 위해 타코의 본질인 고기 양념을 가져오되, 그릇을 토르티야에서 밥으로 바꿨습니다. 초기 타코라이스는 지금처럼 화려한 고명이 아닌 '흰밥 위의 양념 고기'라는 극도의 실용성을 강조한 형태였습니다. 외부의 재료가 들어와도 그 본질만 남기고 자신들의 주식인 밥과 결합해 새로운 전통을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오키나와의 정체성입니다.쌓는 홋카이도와 섞는 오키나와, 당신의 식탁은 무엇을 담는가일본의 양 끝단에 위치한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는 외부 문물을 대하는 방식에서 흥미로운 대비를 보여줍니다. 넓은 평원을 가진 홋카이도가 아이누와 개척민, 서구의 문화를 층층이 '쌓아 올리는' 방식이라면, 좁은 섬에서 끊임없이 배들을 맞이했던 오키나와는 모든 것을 한 냄비에 넣고 '섞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지리적 조건이 식탁의 철학을 결정한 것입니다.오키나와의 식탁은 단순히 맛있는 재료의 나열이 아닙니다. 중국의 돼지, 태국의 쌀, 미국의 통조림, 멕시코의 향신료가 '오키나와'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융합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풍요로운 섞임 뒤에 숨겨진 1945년의 상흔과 사라진 마을들을 기억해야 합니다.오키나와의 식탁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의 삶과 식탁은 낯선 타자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경계를 쌓아 배척할 것인가, 아니면 당신만의 그릇에 담아 새로운 '찬푸루'를 만들어낼 것인가. 이 섬의 600년 역사가 담긴 타코라이스 한 그릇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묵직한 화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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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술을 금하는 이슬람 국가에서 맥주가 맛있었던 이유: 카사블랑카 맥주에 숨겨진 100년의 비밀

카사블랑카 옛 메디나의 성벽에 기대 선 하얀 저택입니다.1930년에 지어진 모로코식 대저택을 고친 건물입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하얀 아치들이 안뜰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야자수 화분 사이로, 스테인드글라스 갓을 쓴 램프들이 노란 빛을 테이블 위에 떨어뜨립니다. 한쪽 구석에서는 피아니스트가 〈As Time Goes By〉를 칩니다.이곳의 이름은 Rick's Café입니다.네, 그 릭의 카페입니다. 1942년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험프리 보가트가 운영하던 바로 그 술집.그런데 저는 이 자리에 앉아서, 제가 앉은 곳이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장소의 복제품이라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영화 〈카사블랑카〉는 카사블랑카에서 찍지 않았습니다. 캘리포니아의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촬영됐습니다. 영화 속 릭의 카페는 세트였습니다. 나무와 합판과 조명으로 만든 가짜 술집.그런데 영화가 너무 유명해지자, 사람들이 이 도시에 와서 없는 카페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찾아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60년이 넘게 흘렀습니다.그러다 미국 대사관의 상무관으로 이 도시에 부임했던 캐시 크리거라는 사람이, 메디나 성벽 옆의 낡은 저택을 사들여 2년 동안 고쳤습니다. 그리고 직접 만들어버렸습니다. 2004년 3월 1일. 영화가 나온 지 62년 만에, 가짜였던 카페가 진짜가 됐습니다.저는 그 카페에서 영화 속 사람들처럼 술을 한잔 주문하려고 했습니다.그때 조금 늦게, 이상한 생각이 하나 들었습니다.여기는 이슬람 국가 아닌가.사실 그 생각은 조금 전 마트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진열대에 맥주가 있었습니다. 와인이 있었습니다. 술을 금하는 종교의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술이 아무렇지 않게 놓여 있었습니다.메뉴판을 보던 저에게 직원이 말했습니다."하이네켄 어때요? 근처에 공장도 있어요."하이네켄. 네덜란드 맥주. 그런데 모로코에, 그것도 근처에 공장이 있다고 합니다.저는 여행을 왔으니 이곳의 맥주를 마셔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직원이 가져온 갈색 병에는 이 도시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Casablanca.한 모금 마셨습니다. 좋았습니다. 생각보다 훨씬.그리고 그 순간부터 이 병 하나가 질문 덩어리가 됐습니다. 술을 금하는 나라에서 누가 이 맥주를 만들었을까. 왜 네덜란드 맥주가 이웃 공장에서 나오고 있었을까. 그리고 왜 하필, 이 맥주에는 도시의 이름이 붙었을까.오늘은 평소와 조금 다르게, 제가 직접 앉았던 자리에서 출발하는 편지를 써보려고 합니다. 카사블랑카에서 고른 한 병을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탐험을 시작합니다.▶ 1장 — 금기와 진열대 사이먼저 제가 마트에서 느낀 당혹감부터 정리해보겠습니다.이슬람의 전통은 사람을 취하게 하는 음료를 금합니다. 이것은 분명한 원칙입니다. 그리고 모로코는 인구의 대부분이 무슬림인 나라입니다.모로코의 법도 이 원칙을 담고 있습니다. 1967년에 내려진 왕령은 무슬림에게 술을 팔거나 건네는 것을 금지합니다. 어기면 최대 6개월의 징역형까지 가능합니다. 법의 문장만 놓고 보면, 술은 외국인과 비무슬림을 위한 상품입니다.그런데 현실의 풍경은 다릅니다.대도시의 대형 마트에는 주류 코너가 있습니다. 도시의 바들은 술을 파는 일을 굳이 숨기지 않습니다. 법과 풍경 사이에 넓은 간극이 있고, 그 간극은 수십 년 동안 유지되어 왔습니다. 라마단 같은 종교적 기간에는 많은 곳에서 판매가 멈추기도 합니다. 금지와 존재가 한 도시 안에서 동시에 숨 쉬고 있는 셈입니다.숫자로 보면 이 간극의 크기가 보입니다. 한 국제 홉 공급업체의 보고서에 따르면, 모로코는 2024년 한 해 동안 약 81만 8천 헥토리터의 맥주를 생산했습니다. 리터로 바꾸면 8천만 리터가 넘습니다. 관광객의 목만 축이는 규모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이 간극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모로코 사회 안에서도 오래된 질문입니다. 오늘 제가 따라가려는 것은 그 논쟁이 아닙니다. 그 간극 안에서 백 년 넘게 살아남은 음료, 맥주 그 자체입니다.그러려면 한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2장 — 황새를 달고 온 양조장1912년, 모로코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됩니다.항구도시 카사블랑카로 프랑스인과 유럽인이 들어옵니다. 그들과 함께 유럽식 도시가 들어오고, 유럽식 식탁이 들어옵니다. 그 식탁에는 와인과 맥주가 있었습니다.1919년, 카사블랑카에 '브라스리 뒤 마록', 모로코 양조회사가 세워집니다. 세운 곳은 프랑스 회사 BGI였습니다. 이 회사의 이름을 풀어보면 '국제 양조장과 제빙소'라는 뜻입니다. 이름 안에 맥주와 얼음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 조합이 왜 중요한지는 잠시 뒤에 이야기하겠습니다.이 양조장이 초기에 만든 맥주의 이름은 '라 시곤', 황새였습니다.황새는 프랑스 동쪽 알자스 지방의 상징입니다. 알자스는 프랑스에서 맥주 양조로 이름난 지역이고, 그래서 프랑스의 여러 양조장이 황새를 간판으로 썼습니다. 그런데 이 새에게는 또 다른 얼굴이 있습니다. 알자스의 황새는 겨울이면 남쪽으로 날아가고, 그 길목에 모로코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로코에서 황새는 복을 부르는 길한 새입니다.맥주는 식민 정착민을 위한 것이었지만, 병에 그려진 새는 양쪽 땅 모두에서 반가운 새였습니다.여기서 흥미로운 일이 벌어집니다.1929년, 이 양조회사는 같은 '라 시곤'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음료를 내놓습니다. 레몬 맛 탄산음료, 레모네이드였습니다.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무슬림 모로코인을 손님으로 만드는 것.이 레모네이드는 모로코의 국민 음료가 됩니다. 두툼한 유리병은 동네 가게로 돌아가 다시 채워졌고, 무더운 여름이면 사람들이 기다리다 못해 공장에 직접 빈 병을 들고 가서 채워 오기도 했다고 기억됩니다.생각해보면 묘한 장면입니다. 금기 앞에서 양조장이 선택한 방법은 금기를 바꾸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음료를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황새가 한쪽 병에서는 맥주를, 다른 쪽 병에서는 레모네이드를 담았습니다.술을 금하는 사회에서 양조장이 살아남는 첫 번째 방식은, 술만 만드는 곳이 아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3장 — 라거는 얼음을 먹고 자란다이제 병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맥주는 곡물을 발효시킨 음료입니다. 보리를 싹 틔워 말린 것이 맥아입니다. 맥아를 뜨거운 물에 담그면 맥아 속 효소가 녹말을 당으로 쪼갭니다. 이 달콤한 액체에 효모를 넣으면, 효모가 당을 먹고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를 만듭니다. 여기까지는 모든 맥주가 같습니다.차이는 효모와 온도에서 갈립니다.제가 카사블랑카에서 마신 맥주는 라거였습니다. 라거 효모는 발효통의 아래쪽에서, 낮은 온도로 천천히 일합니다. 대략 섭씨 10도 안팎의 서늘한 환경입니다. 발효가 끝나면 다시 차가운 곳에서 몇 주를 재웁니다. '라거'라는 말 자체가 독일어로 '저장하다'에서 왔습니다.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발효하면, 효모가 만드는 과일 향 같은 부산물이 적어집니다. 그래서 라거는 맑고, 깔끔하고, 청량합니다. 대신 조건이 까다롭습니다. 일정하게 차가운 온도가 오래 유지되어야 합니다.자, 여기서 앞의 회사 이름이 다시 등장합니다.모로코의 여름은 뜨겁습니다. 라거가 원래 태어난 곳은 겨울 얼음을 동굴에 채워 넣던 중부 유럽이었습니다. 이런 음료를 북아프리카에서 만들려면 인공적인 냉기가 필요합니다. 19세기 후반 냉동 기술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라거는 기후를 넘어설 수 있게 됐습니다.그래서 양조장과 제빙소가 한 회사의 이름 안에 함께 있었던 겁니다. 뜨거운 땅에서 차가운 맥주를 만든다는 것은, 얼음을 만든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습니다.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차가운 라거는 뜨거운 기후와 유난히 잘 맞습니다. 차가운 온도는 쓴맛과 단맛에 대한 혀의 감각을 누그러뜨리고, 탄산은 입안을 씻어냅니다. 모로코 양조업계도 Casablanca를 더운 여름날에 어울리는 가볍고 청량한 라거로 소개합니다.제가 한 모금에 좋다고 느낀 데에는, 어쩌면 이 과학도 조금 거들었을 겁니다.▶ 4장 — 하이네켄이 수출한 것은 맥주가 아니었다 이제 직원의 그 말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근처에 공장도 있어요."1956년, 모로코는 독립합니다. 식민지 시절의 양조장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에는 외국 자본이 소유한 기업을 모로코 쪽으로 넘기는 이른바 '모로코화' 정책이 진행되면서, 프랑스 회사가 가진 양조장 지분이 모로코의 국가 투자회사로 넘어갑니다. 이 시기에 모로코 양조 기술자들이 다시 짠 레시피로, 지금도 모로코 바의 대표 맥주로 꼽히는 '플래그 스페시알'이 나왔다고 전해집니다.그리고 1980년, 모로코 양조회사는 네덜란드의 하이네켄과 라이선스 계약을 맺습니다. 하이네켄과 암스텔을 모로코 공장에서 직접 만들게 된 겁니다.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네덜란드 맥주를 모로코에서 만들면, 그것은 같은 맥주일까요.하이네켄은 이 질문에 아주 오래전에 답을 준비해두었습니다.1886년, 하이네켄의 실험실에서 엘리온이라는 화학자가 순수한 맥주 효모 한 종을 배양해냅니다. 엘리온은 미생물학의 아버지 루이 파스퇴르의 제자였습니다. 이 효모에는 'A-효모'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맥주의 맛을 결정하는 요소는 많습니다. 물, 맥아, 홉. 하지만 발효 중에 어떤 향이 생기는지는 상당 부분 효모가 결정합니다. 그래서 하이네켄은 이 효모를 네덜란드에서 배양해, 하이네켄을 만드는 세계의 양조장으로 보냈습니다. 1980년 무렵에는 오렌지색 전용 상자에 담아 비행기 냉장칸으로 실어 보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효모만 보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네덜란드 기술자가 현지에 설비를 설치하고, 현지 직원은 네덜란드에서 교육을 받고, 현지의 시음단이 결과물을 맛보며 기준을 지킵니다.그러니까 하이네켄이 세계로 수출한 것은 맥주가 아니었습니다. 살아 있는 미생물 한 종과, 그 미생물을 다루는 규칙이었습니다.어디서 마셔도 같은 맛. 그것이 하이네켄이 낯선 땅의 소비자에게 건넨 약속이었습니다.▶ 5장 — 밖을 향해 붙인 이름 이 무렵 모로코의 양조장에서는 다른 종류의 약속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1996년, 모로코 양조회사는 새 맥주를 내놓습니다. 이름은 Casablanca. 5도짜리 황금빛 라거입니다.그런데 제가 자료를 찾다가 멈춰 선 대목이 있습니다. 이 맥주는 처음에 모로코 사람들을 위해 만든 맥주가 아니었습니다. 수출 전용이었습니다. 바다 건너 외국 시장을 겨냥한 맥주였습니다.그러니 이름이 Casablanca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카사블랑카는 포르투갈어로 '하얀 집'이라는 뜻입니다. 아랍어 이름인 다르 엘 베이다도 같은 뜻입니다. 하지만 모로코 밖의 사람들에게 이 이름은 무엇보다 영화의 제목입니다. 바다 건너 소비자가 모로코를 몰라도, 카사블랑카라는 이름은 압니다.이 맥주는 지금도 미국 플로리다 디즈니 월드의 모로코 전시관에서 팔립니다. 도시의 이름이 병에 담겨, 그 도시를 가본 적 없는 사람들의 식탁으로 건너간 겁니다.그리고 반전이 이어집니다. 수출용 맥주가 성공하자, 이번에는 모로코 안에서 이 맥주를 찾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결국 2000년대에 들어 Casablanca는 모로코 시장에서도 팔리기 시작합니다.어디서 들어본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밖에서 온 사람들이 영화 속 카페를 찾자, 이 도시에 그 카페가 생겼습니다. 밖을 향해 만든 맥주가 성공하자, 그 맥주가 이 도시로 돌아왔습니다.제가 로컬 맥주라고 믿고 고른 그 병은, 사실 여행자의 눈을 위해 태어난 맥주였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정말로 이 도시의 맥주가 됐습니다.▶ 6장 — 초록 병과 갈색 병 마트의 맥주 냉장고를 다시 떠올려보겠습니다.초록색 하이네켄 병이 있고, 그 옆에 갈색 Casablanca 병이 있습니다. 둘 다 라거이고, 둘 다 차갑게 마십니다. 그런데 이 두 병은 유리 색깔부터 다릅니다.병 색깔은 디자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과학의 문제이기도 합니다.맥주의 쓴맛은 홉에서 옵니다. 홉의 쓴맛 성분은 빛에 약합니다. 특히 파란색 계열의 빛과 자외선을 받으면, 맥주 속 비타민의 일종인 리보플래빈이 그 빛 에너지를 홉 성분에 전달합니다. 그러면 홉 성분이 쪼개지면서 황을 품은 화합물이 생깁니다. 이 화합물은 사람의 코가 극히 적은 양으로도 알아챌 만큼 냄새가 강합니다. 흔히 스컹크 냄새라고 부르는, 빛을 맞은 맥주 특유의 냄새입니다.갈색 유리는 이 빛을 대부분 걸러냅니다. 초록색 유리는 그보다 덜 걸러냅니다.그렇다면 초록 병은 잘못된 선택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이네켄에게 초록 병은 세계 어디서나 한눈에 알아보게 하는 얼굴입니다. 그 얼굴을 지키는 대신, 빛을 막는 일은 포장과 유통과 보관의 과제로 가져갑니다.두 병은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낯선 손님에게 이 맥주를 어떻게 믿게 할 것인가.하이네켄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어디서 열어도 같은 얼굴, 같은 맛이라고. 그래서 효모를 보내고, 규칙을 보내고, 초록 병을 지켰습니다.Casablanca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 도시에서 왔다고. 그래서 도시의 이름을 붙이고, 갈색 유리 위에 금색 장식의 라벨을 둘렀습니다.한쪽은 장소를 지워서 믿음을 얻었고, 다른 쪽은 장소를 새겨서 믿음을 얻었습니다.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같은 질문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개의 답입니다.▶ 7장 — 제가 몰랐던 뒷이야기그리고 이 편지를 쓰려고 자료를 뒤지다가, 저는 그 카페에서 몰랐던 이야기를 하나 알게 됐습니다."근처에 공장도 있어요." 그날 직원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1980년부터 40년 넘게, 하이네켄은 정말로 이 도시의 공장에서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그런데 이 말은 이제 사실이 아닙니다.2023년 9월, 모로코 양조회사는 하이네켄과의 라이선스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발표합니다. 계약은 그해 12월에 끝났습니다. 2022년 기준으로 하이네켄 브랜드는 이 회사 매출의 17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작지 않은 비중입니다.그 뒤로 모로코의 하이네켄은 카사블랑카의 한 유통업체를 통해 들어오는 수입 맥주가 됐습니다. 이웃 공장의 맥주가, 바다를 건너오는 맥주로 바뀐 겁니다.그리고 2024년 9월, 모로코 양조회사는 새 파트너와 손을 잡습니다. 덴마크의 칼스버그입니다. 칼스버그와 1664를 모로코에서 직접 만들어 파는 계약이었습니다.여기서 저는 잠시 웃었습니다. 1664는 원래 프랑스 알자스, 스트라스부르의 맥주입니다. 지금은 칼스버그 그룹에 속해 있습니다. 백 년 전 황새를 달고 이 도시에 왔던 바로 그 알자스의 맥주가, 이번에는 덴마크 회사의 이름을 달고 다시 카사블랑카의 공장으로 들어온 겁니다.그럼 이제 제가 마신 맥주의 국적을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공장은 모로코에 있습니다. 회사의 최대주주는 2003년부터 프랑스의 카스텔 그룹입니다. 같은 공장에서 덴마크 그룹의 라이선스 맥주가 나옵니다. 그 라이선스 맥주 중 하나는 알자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제 손에 들린 병에는 이 도시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이 맥주는 어느 나라의 맥주일까요.▶ 8장 — 맥주는 늘 자기가 선 땅의 모양을 닮았다맥주는 아주 오래된 음료입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에 맥주가 기록된 것은 수천 년 전의 일입니다. 맥주는 오늘날의 어떤 종교보다 오래됐고, 어떤 국가보다 오래됐고, 어떤 브랜드보다 오래됐습니다.그래서 맥주는 언제나 자신이 놓인 땅의 조건에 맞춰 모양을 바꿔왔습니다. 추운 보헤미아에서는 황금빛 필스너가 됐고, 네덜란드에서는 효모 한 종으로 세계를 묶는 브랜드가 됐습니다.그리고 카사블랑카에서 맥주는 조금 더 복잡한 모양이 됐습니다.이 양조장은 식민 통치와 함께 들어왔습니다. 그 사실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동시에 그 양조장은 독립 이후 모로코의 산업이 됐고, 모로코 기술자들의 레시피가 됐고, 이 도시의 이름을 단 맥주가 됐습니다. 이 두 사실 중 하나만 골라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밖에서 강요된 것이 시간이 지나 안의 것이 되는 과정은, 언제나 그 두 얼굴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금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금기는 이 도시에서 맥주를 없애지 않았습니다. 대신 맥주를 만드는 회사가 레모네이드를 만들게 했고, 법과 풍경 사이에 좁고 긴 틈을 만들었습니다. 맥주는 그 틈에서 백 년을 버텼습니다.▶ 클로징 — 다시, 릭의 카페다시 그 하얀 아치 아래로 돌아가 보겠습니다.램프의 노란 빛이 테이블에 떨어지고, 피아니스트는 여전히 같은 노래를 칩니다. 제 앞에는 반쯤 남은 갈색 병이 있습니다.그날 저는 제가 대단히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세계의 맥주를 두고, 이곳에만 있는 로컬 맥주를 골랐다고.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제가 앉은 카페는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장소의 복제품이었습니다. 제가 고른 맥주는 처음에 바다 건너 외국인을 위해 만든 맥주였습니다. 그 맥주를 만든 양조장은 식민지 시대 프랑스 회사가 세웠고, 지금은 프랑스 그룹이 최대주주이며, 같은 공장에서 덴마크의 맥주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직원이 권했던 세계의 맥주는, 제가 떠난 뒤 오히려 이 도시의 공장을 떠났습니다.로컬이라고 믿고 고른 한 병 안에는 세계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병은 분명히 이 도시의 맛이었습니다.가짜로 시작한 카페가 진짜가 된 것처럼, 밖에서 온 것들은 이 도시에서 시간을 들여 진짜가 됐습니다. 그것이 제가 카사블랑카의 한 병에서 마신 것이었습니다.식민의 역사는 이 도시에 양조장을 남겼고, 금기는 그 양조장에 또 다른 얼굴을 주었고, 시간은 밖에서 온 것을 이 도시의 맛으로 바꾸었습니다.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남습니다. 오늘 이야기에 등장한 이름들을 다시 떠올려보겠습니다. 하이네켄, 암스텔, 칼스버그, 1664, 카스텔. 우리가 마시는 맥주의 이름은 수백 개인데, 그 이름들의 주인은 생각보다 적습니다. 다음 편지에서는 그 질문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맥주의 주인은 누구인가.오늘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카사블랑카에서, 《맛의 문명사》 편집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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