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의 문명사》유럽도 아시아도 아닌 맛, 동유럽 음식의 정체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어느 식당에 들어갔다고 상상해보겠습니다.메뉴판을 펼칩니다. 굴라시가 있습니다. 소고기를 파프리카와 함께 오래 끓인 스튜입니다. 옆에는 렉샤스가 있습니다. 쌀과 고기와 채소를 함께 볶은 것으로, 어딘가 중앙아시아의 필라프와 닮아 있습니다. 그 옆에는 발효 양배추를 곁들인 돼지 족발 요리가 있습니다. 독일의 슈바인스학세와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디저트 메뉴에는 터키의 바클라바와 형제처럼 닮은 페이스트리가 있고, 두꺼운 사워크림이 얹힌 팬케이크도 있습니다.한 식당 안에서 여러 세계가 교차합니다.이번엔 폴란드 크라쿠프의 시장 노점으로 가보겠습니다. 피에로기라는 만두를 팝니다. 밀가루 반죽 안에 으깬 감자와 치즈가 들어있는데, 생김새가 중국 교자와 닮았습니다. 그 옆에서는 굵은 소시지를 불판에 굽고 있습니다. 독일 뉘른베르크의 소시지와 분위기가 비슷합니다. 그런데 소시지를 먹을 때 곁들이는 겨자 소스에는 꿀이 들어있습니다. 중동의 영향이 느껴집니다.이것이 동유럽 음식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각입니다. 익숙한데 낯설고,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고, 유럽 같기도 하고 아시아 같기도 하고, 어딘가 중간 어딘가에 있는 느낌.오늘은 그 느낌의 정체를 찾아갑니다.동유럽 음식이 섞여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리가 만든 숙명이었고, 역사가 남긴 흔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생각보다 훨씬 오래되고 훨씬 넓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탐험을 시작합니다.▶ 지도가 먼저다 동유럽을 이해하려면 먼저 지도를 봐야 합니다.서쪽으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동쪽으로는 러시아, 북쪽으로는 발트해, 남쪽으로는 흑해와 지중해. 동유럽은 이 모든 방향에서 오는 무언가와 접하고 있습니다.그리고 결정적인 지형이 있습니다. 광활한 평원입니다.유럽의 지형을 보면 서쪽과 남쪽은 산맥으로 가득합니다. 알프스, 피레네, 아펜니노. 이 산맥들이 자연스러운 장벽이 됩니다. 하지만 동유럽으로 갈수록 지형이 평탄해집니다. 카르파티아 산맥이 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우크라이나의 스텝 지대에서 폴란드의 평원까지 수천 킬로미터가 거의 막힘 없이 이어집니다.이 평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장벽이 없다는 것은 통로라는 뜻입니다. 동쪽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면 이 평원을 타고 서쪽까지 올 수 있습니다. 서쪽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면 동쪽까지 흘러갈 수 있습니다. 북쪽과 남쪽을 연결하는 강들이 그 이동을 더 쉽게 만들었습니다.동유럽은 만들어지는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이었습니다.수천 년 동안 이 지역을 통과한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지나갔습니다. 군대가 지나갔습니다. 상인들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과 요리법과 식재료가 지나갔습니다.어떤 것들은 통과해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남았습니다.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미 있던 것들과 섞였습니다.지금 동유럽 음식이 섞여 보이는 이유는, 그 땅이 수천 년 동안 수많은 것들이 지나가고 머문 통로였기 때문입니다.▶ 말을 타고 온 맛 기원전부터 중세까지, 동유럽 평원을 가장 극적으로 가로지른 것은 중앙아시아에서 온 유목 민족들이었습니다.훈족, 아바르족, 불가르족, 마자르족, 그리고 몽골족. 이들은 말을 타고 이 평원을 질주했습니다. 무기를 들고 왔지만, 그들의 삶의 방식도 함께 왔습니다. 그리고 그 삶의 방식 안에는 음식이 있었습니다.유목민의 음식은 이동에 최적화되어 있었습니다.말 위에서, 텐트 안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먹어야 하는 음식. 복잡한 준비가 필요 없고, 오래 보관할 수 있고, 칼로리가 높아야 합니다. 그래서 유목민의 음식은 고기 중심이었고, 끓이거나 말리는 방식이 주를 이뤘습니다. 커다란 냄비에 고기와 뼈를 넣고 오래 끓이는 방식은, 모닥불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조리법이었습니다.이것이 동유럽 스튜 문화의 뿌리 중 하나입니다.헝가리의 굴라시를 보겠습니다. 소고기를 큼직하게 자르고, 양파와 파프리카와 함께 오래 끓입니다. 이 조리법의 기본 구조, 즉 큰 고기를 끓여서 만든 걸쭉한 스튜는 유목 문화의 흔적과 닮아 있습니다. 물론 파프리카는 아메리카에서 온 것이고 굴라시가 지금의 형태가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입니다. 하지만 그 조리법의 뼈대는 이동하는 사람들이 들고 다닌 것입니다.몽골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3세기 몽골 제국은 폴란드와 헝가리까지 침입했습니다. 단기간에 끝났지만,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흔적이 남았습니다. 중앙아시아의 조리 방식과 식재료가 동유럽과 처음으로 직접 접촉했습니다.이동하는 사람들은 복잡한 요리를 만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다닌 단순한 음식이, 정착한 곳의 재료와 만나면서 새로운 것이 됩니다.▶ 오스만이 남긴 맛의 지층이번엔 남쪽에서 올라온 이야기입니다.14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만 제국은 유럽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의 터키를 중심으로 아나톨리아, 중동, 북아프리카, 그리고 유럽 남동부까지 지배했습니다.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알바니아, 그리스, 헝가리 일부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향권에 있었습니다.5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 지역에 오스만 문화가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화의 가장 강력한 흔적 중 하나가 음식입니다.구체적으로 무엇이 왔는지를 보겠습니다.향신료가 왔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실크로드 무역의 중심에 있었고, 동방의 향신료가 이 제국을 통해 유럽으로 들어왔습니다. 계피, 정향, 고수, 커민이 동유럽 요리에 스며들었습니다. 불가리아의 전통 소시지 루카넨카에는 커민이 들어갑니다. 루마니아의 고기 요리 미티테이에는 고수와 계피가 들어갑니다. 서유럽 요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향신료 조합입니다.요리 방식도 왔습니다. 고기를 꼬치에 꿰어 직화로 굽는 방식은 중동과 중앙아시아의 전통입니다. 이것이 발칸 반도 전역에 퍼졌습니다. 지금도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와 불가리아의 거리에서 꼬치 고기를 굽는 냄새가 납니다.과자와 디저트도 왔습니다. 얇은 반죽을 겹겹이 쌓아 만드는 필로 도우, 그 안에 견과류와 꿀을 넣은 바클라바. 이것은 오스만 궁정 요리에서 발달해서 지배 지역 전체로 퍼진 디저트입니다. 지금도 불가리아, 루마니아, 그리스, 터키에 걸쳐 거의 동일한 형태의 바클라바가 존재합니다.커피 문화도 왔습니다. 오스만 방식의 진한 커피, 즉 작은 잔에 커피 가루를 그대로 끓여 마시는 방식이 발칸 반도 전역에 퍼졌습니다. 터키 커피라고 불리지만 보스니아에서는 보산스카 카파, 그리스에서는 엘리니코스 카페스라고 부릅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만드는 방법은 같습니다.오스만 제국은 단순히 영토를 지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500년에 걸쳐 맛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맛은 제국이 사라진 뒤에도 남았습니다.▶ 서쪽에서 온 빵과 유제품이번에는 서쪽을 보겠습니다.게르만 민족의 이동과 정착, 로마 가톨릭의 확산,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 서유럽의 영향이 동유럽으로 흘러들어온 것도 수백 년에 걸쳐 일어났습니다.서유럽 농경 문화의 핵심은 밀이었습니다. 정교한 빵 문화, 발달한 유제품, 체계적인 축산. 이것이 동유럽으로 들어오면서 이미 있던 고기 문화, 발효 문화와 결합했습니다.폴란드의 피에로기를 다시 보겠습니다. 밀가루 반죽으로 만두를 빚는 것은 서유럽의 빵 문화와 동아시아의 만두 문화 사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안에 들어가는 재료는 감자, 치즈, 사워크라우트, 고기 등 동유럽의 저장 음식들입니다. 밀가루 반죽이라는 서쪽의 기술 안에, 동유럽의 보존 음식 재료들이 들어간 겁니다.체코의 스비치코바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소고기를 오래 끓여서 부드럽게 만든 다음, 사워크림 소스를 얹어서 빵 만두인 크네들리키와 함께 먹습니다. 고기 스튜는 유목 전통에서, 사워크림은 유제품 문화에서, 크네들리키는 중부 유럽 빵 문화에서 왔습니다. 한 접시 안에 세 가지 다른 전통이 평화롭게 공존합니다.합스부르크 제국은 특히 중요합니다. 수백 년 동안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루마니아 일부를 하나의 제국으로 묶었습니다. 빈의 궁정 요리 문화가 이 지역 전체로 퍼졌고, 각 지역의 전통 음식이 빈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헝가리의 케이크 문화, 체코의 스튜 문화, 크로아티아의 해산물 요리까지 합스부르크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섞인 것이 아니라 쌓인 것이제 한 걸음 물러서서 전체를 봐보겠습니다.우리는 흔히 동유럽 음식이 섞여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를 통해 보면 그것이 정확한 표현이 아닐 수 있습니다.섞인다는 것은 여러 가지가 동등하게 합쳐져서 새로운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동유럽에서 일어난 일은 그것과 조금 다릅니다.각 시대마다 무언가가 지나가거나 머물렀고, 그때마다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흔적들이 지워지지 않고 층층이 쌓였습니다. 유목 민족의 고기 문화가 깔렸고, 그 위에 오스만의 향신료가 얹혔고, 다시 그 위에 서유럽의 밀과 유제품이 더해졌습니다. 각 층이 아래 층을 완전히 덮지 않고, 공존하면서 섞였습니다.지질학자들이 암석의 지층을 보고 그 땅의 역사를 읽는 것처럼, 동유럽 음식의 층을 읽으면 그 땅을 지나간 역사가 보입니다.굴라시 한 그릇에는 유목민의 끓이는 방식이 있고, 파프리카라는 오스만 시대를 통해 들어온 향신료가 있고, 밀가루 국수나 빵이 곁들여집니다. 하나의 요리가 여러 시대의 기록입니다.동유럽 음식은 혼합이 아니라 기록입니다. 이 땅을 지나간 모든 것들의 기록.그래서 동유럽 음식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그 묘한 감각, 익숙한데 낯선 그 느낌이 생기는 겁니다. 그 음식 안에 여러 세계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중앙아시아도 있고 지중해도 있고 중부 유럽도 있습니다. 어느 하나에 완전히 속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처음부터 하나가 아니었으니까요.▶ 마치며부다페스트의 그 식당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굴라시를 한 숟갈 뜨면서 이 이야기를 떠올린다면 어떨까요. 이 스튜 안에는 말을 타고 평원을 달리던 사람들이 있고, 향신료 무역로를 따라 이동하던 오스만 상인들이 있고, 밀밭을 일구던 중부 유럽 농부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이 땅을 지나가면서 무언가를 남겼고, 그것들이 지금 이 한 그릇 안에 모여 있습니다.음식이 기록이라면, 동유럽 음식은 그 어느 곳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은 기록입니다. 교차로에 서 있는 땅, 수많은 것들이 지나가고 머물고 충돌하고 섞인 땅. 그 모든 것이 맛 안에 남아 있습니다.어떤 문화가 위대한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이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경계에 있다는 것은 가장 다양한 이야기를 품게 된다는 것입니다.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오늘의 동유럽 음식을 만들었습니다.다음 시간에는 이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를 합니다. 동유럽 음식은 왜 이렇게 무겁고 든든할까요. 그것이 단순히 기후와 역사의 문제를 넘어, 노동과 몸과 에너지의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 이야기로 이 탐험을 마무리하겠습니다.오늘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